교육/시&소설 61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⑨: 서정주, 국화 옆에서

1.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세계 세상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사람들이 내딛는 발걸음, 속삭이는 말, 따스한 손길 하나하나가 씨실과 날실로 엮이어 인생이라는 무늬를 만들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를 향한 깊은 연결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전 우주에 울림을 주는 모습이 이 시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입니다. 2. 서정주,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

교육/시&소설 2024.08.23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⑧: 이육사, 절정

1. 눈을 감는 이유누구나 어려운 시기를 겪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의 고난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죠. 때로 고난은 우리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기 때문이죠. 힘든 순간일수록, 그 고난을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육사가 눈 감아 생각해 보는 까닭도 새로운 눈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2. 이육사,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교육/시&소설 2024.08.23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⑦: 이용악, 그리움

1. 그리움은 풍경이다. 그리움은 마음에 새겨진 따뜻한 흔적, 시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의 자국입니다. 멀리 있어도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고, 보이지 않지만 마음 채우는 잔잔한 소리입니다. 그리움은 잡히지 않지만 항상 곁에 머물러 있는 바람이며, 그리움은 풍경입니다. 이용악는 그리움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2. 이용악,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출전 : 《이용악집》(19..

교육/시&소설 2024.08.22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⑥: 유치환, 깃발

1.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하는  떠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머물러야 한다는 현실감. 우리는 늘 그 사이를 걸어갑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고, 얽매인 현실에서도 벗어나고 싶지만 한 편에서는 지금껏 쌓아온 삶의 기반과 안정적인 내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토록 복잡한 두 마음, 쉽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만 같은데, 유치환의 시를 일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2. 유치환,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1936. 01)..

교육/시&소설 2024.08.22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⑤: 백석, 여우난골족族

1. 가족의 의미와 가치  ‘수능생을 눈물 바다로 만든 역대 지문 베스트3’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세 작품의 공통점은 소재가 모두 가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위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는데 이별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작품이었지요. 오늘 감상할 시는 그 반대입니다. 가족들과의 이별이 아닌 가족들과 만남을 통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갖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되죠. 바로 바로 백석의 ‘여우난골족’입니다.   2. 백석,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

교육/시&소설 2024.08.21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④: 이상, 거울

1.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헤아리기 힘든 길은 바로 사람 속입니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서도 유독 변모가 심하고 끝을 내다보기 어려운 길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명료한 선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죠. 이상의 시 ‘거울’은 이러한 어려움을 다룹니다. 거울을 통해 사실상 마주하기 어려운 '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 이상, 거울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幄手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마는..

교육/시&소설 2024.08.21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③ - 정지용, 유리창琉璃窓

1. 보이지 않는 벽  벽에 대한 은유는 여러 시에서 나타납니다. 벽은 대개 극복할 수 없는 제약,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 절망적인 상황 조건 등을 드러내죠. 이 세가지가 모두 결합되어 처절한 상황 속에 있으나, 아비의 잠잠한 눈물로 승화되는 시가 있으니 바로 정지용의 유리창입니다. 자리하고 있지 않은 벽처럼 너머의 별빛도 찬란하게 비춰오는 유리창을 경계로 시인의 감정도 결코 넘어섬이 없어 황홀한 시 유리창을 만나 보겠습니다.    2. 정지용, 유리창 琉璃窓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교육/시&소설 2024.08.20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② -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1.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去者必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일단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말만 떠오르시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면 시험에 주구장창 나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시로는 님의 침묵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지 않는 시절에 시험 대비용으로 회자정리만 열심히 외웠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저도 다시금 만나보려 합니다.2.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교육/시&소설 2024.08.20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① : 김소월, 진달래 꽃

1. 시(詩)를 감상할 수 있길 바라며. 시를 분석과 해체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학생들을 자주 보기에, 시를 감상과 해설로 만나는 시간을 마련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 또한  시가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도움을 받을 것이 이숭원 선생님의 글들입니다. 이 분의 해설을 발판으로 시의 세계를 새로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여기에는 이숭원 선생님의 글 몇 편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입니다. 2. 김소월, 진달래 꽃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

교육/시&소설 2024.08.20

황석영, 삼포가는 길: 삼포는 가능성을 품은 한 사람, 한 사람

꽃은 아름답고, 열매는 성하나 용비어천가에 대해 알고 있나요? 세종 29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 2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니,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가 많이 성하다.’ 그 후 500년이 지나 1970년대를 맞이한 한국 경제는 실로 풍성한 꽃과 열매를 맺었어요. ‘제1·2차 경제 개발 5개년계획(1962∼1971)을 추진하는 동안 연평균 8.6%의 고도성장을 달성하고, 경제규모는 3조 4191억 원으로 11배 이상 늘어나며, 1인당 국민총생산은 1961년 82달러에서 1971년에는 289달러로, 1977년에는 1천 달러를 넘어서는 호황을 누립니다. 그러나 화려했던 산업화의 이면은 심각했습니다. 극단적인 도시화로 농어촌은 해체되었고, 도시빈민, 농민, 노동자..

교육/시&소설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