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⑤: 백석, 여우난골족族

education guide 2024. 8. 21. 13:48

 1. 가족의 의미와 가치 

 

수능생을 눈물 바다로 만든 역대 지문 베스트3’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세 작품의 공통점은 소재가 모두 가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위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는데 이별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작품이었지요. 오늘 감상할 시는 그 반대입니다. 가족들과의 이별이 아닌 가족들과 만남을 통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갖는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되죠. 바로 바로 백석의 여우난골족입니다.

 

 2. 백석, 여우난골족族 

백석(백기행, 1912-1996 향년83세)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아들 승동이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 누이 사촌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기떡 콩가루찰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옆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랫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윗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대의 사기 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계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1935. 12).출전 : 《사슴》(1936). 첫 발표는 《조광》

 

 3. 이숭원 해설 

이 시를 처음 읽는 사람은 시행마다 나오는 낯선 말에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길게 이어지는 시행을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망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의 쓰임새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 안 가서 이 시의 어조에 친숙해지고 그 의미도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시에는 낯선 평북 방언과 독특한 민속적 소재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특수한 시어와 소재를 통해 이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삶이다. 요컨대 가장 지방적이고 특수한 것을 통해 가장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독특한 방법이 구사된 것이다.

 

이 시는 매우 두드러진 율동감을 드러낸다. 그 율동감은 명절이 내포한 놀이의 흥겨움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것은 복잡한 운율적 장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복, 열거, 대구 등의 단순한 방법에 의해 조성된다. 비유의 방법 역시 세련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어법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시골의 토속적인 사물을 통해 비유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것은 도시의 세련된 비유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농촌의 소박한 어법을 그대로 차용하는 시인의 의도적 방법론이다.

여우난골족 백석 글/홍성찬 그림, 창비, 2007

 

<여우난골족族>이라는 제목의 뜻은 여우가 나오는 골짜기에 사는 가족이라는 뜻이다. 큰집이 있는 곳이 바로 여우난골이고 명절날 그곳으로 모인 친척이 여우난골족이다. 시는 네 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네 연은 일종의 연극적 전개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연은 연극이 벌어질 공간의 제시이며 둘째 연은 연극의 등장인물을 소개한 것이고 셋째 연은 명절의 옷과 음식을 통하여 흥성스러운 분위기를 제시한 것이다. 넷째 연에 이르러 비로소 연극의 본마당이 펼쳐진다. 연극의 본 마당은 가족 구성원이 모두 참여하는 놀이의 공간이다.

 

연극의 공간으로 진입하는 첫 장면은 출발부터가 흥겹다. 나는 엄마 아버지를 따라가고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간다는 설정은 산골 마을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천진하게 나타낸다. 여기 나오는 큰집은 유교적 규범성을 지닌 가부장적 권위의 표상이 아니라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는 축제의 공간이다. 어린이의 시각으로 서술하였기 때문에 규범에 속하는 것은 배제되고 친척들끼리의 즐거운 모임만이 표면에 서술된다.

 

 

2연에는 명절날 모인 여러 인물이 소개된다. 신리에 사는 고모는 얼굴이 약간 얽었으며 말할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는 버릇이 있는데, 하루에 베 한 필을 짤 정도로 부지런하고 근면하다. 토산에 사는 고모는 열 여섯에 마흔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로 들어갔는데, 그래서인지 공연히 화를 잘 내고 살빛과 입술 빛은 마치 메주를 쑤고 남은 물처럼 검은빛을 띠었다. 큰골 고모는 산 너머 해변에 사는 과부인데, 자신의 처지에 맞게 흰옷을 단정하게 입었으나 혼자 사는 일이 힘들어서인지 눈물을 흘릴 때가 많다. 슬픔을 달래려고 술을 자주 먹었는지 코끝이 빨갛게 되었다. 삼촌은 배나무 접을 잘 붙이고 오리 덫을 잘 놓는 기술이 있는데 술에 취하면 토방돌을 뽑아 버리겠다고 주정을 하기도 한다. 풍어 때가 되면 먼 섬에 혼자 가서 밴댕이젓을 담그고 오는 낭만적인 인물이다. 3명의 고모와 1명의 삼촌, 그리고 그들의 자손인 사촌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방에 그득히 모인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풍요롭다.

 

여우난골족 백석 글/홍성찬 그림, 창비, 2007

 

세련된 도시의 감각으로 보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언가 좀 부족해 보인다. 얼굴이 얽었거나, 눈을 껌벅거리거나, 열여섯에 마흔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되었거나, 코끝이 빨간 과부거나, 술주정이 심하거나 한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은 도시의 세련된 시각에서 보면 무언가 부족해 보이지만 시골에 가면 지극히 흔하게 접하게 되는 평범하고 소박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정경은 그지없이 평화롭고 풍성하다. 이들이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음식을 먹고 놀이를 하는 큰집의 공간 속에서 이들의 개인적 약점은 모두 가려진다. 그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평화롭고 풍성한 유대감은 그곳을 충만한 화합의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들의 인간적 결함조차 이곳에서는 가족끼리의 정겨운 친화력으로 작용한다.

 

4연은 이 시의 본마당인 놀이 장면이다. 앞부분은 해 지기 전까지 마당에서 노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일몰 후 방에서 노는 장면이다. 여기 나오는 놀이들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아주 생소하다. 백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1910년대나 20년대에는 이 놀이가 잔존했을지 모르나 이 시를 쓰던 3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는 일제의 고유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그 토속적 유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백석은 사라져 가는 어린 시절의 놀이를 세세히 떠올려 그것을 열거해 놓았다. 웃고 떠들며 밤을 지새우던 놀이의 시간 속에 평화로운 삶의 바탕이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개의 가족 구성원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적 합일의 공간 속에 우리들 생활의 힘과 기쁨과 보람이 스며 있다는 믿음을 이 시의 문맥은 함축하고 있다.

여우난골족 백석 글/홍성찬 그림, 창비, 2007

 

백석의 시가 음식과 놀이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 두 가지가 본능에 밀착된 그리움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먹는 것과 노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된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반복되어 재생된다. 그는 먹는 것과 노는 것, 이 두 가지 요소를 기본축으로 하여 그의 기억 속에 긴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우난골족의 삶의 실체를, 그 안에 있는 근원적 세계를 탐구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우난골족’은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을 누리고 있는 민족 전체의 비유. 이 시가 백석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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