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하는
떠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과 머물러야 한다는 현실감. 우리는 늘 그 사이를 걸어갑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고, 얽매인 현실에서도 벗어나고 싶지만 한 편에서는 지금껏 쌓아온 삶의 기반과 안정적인 내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토록 복잡한 두 마음, 쉽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만 같은데, 유치환의 시를 일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2. 유치환,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1936. 01).출전 : 《청마시초》(1939). 첫 발표는 《조선문단》
3. 이숭원 해설
이 시는 1936년 1월에 발표된 작품으로 유치환의 대표작 중 하나다.
유치환의 시가 장중한 어조로 관념적 내용을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는 절제된 어조로 대상의 한순간을 간결하게 드러내고 있다. 첫 행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은 우리 근대시에서 드물게 보는 멋진 구절이다. 깃발의 나부낌을 여러 사람이 소리를 치는 아우성으로 본 것도 놀랍고 그것을 다시 ‘소리 없는’이라는 말로 수식하여 모순어법으로 변형시킨 것도 뛰어나다. 그리고 ‘저것’이나 ‘그것’대신에 ‘이것’이라는 근칭近稱의 지시어를 선택한 것은 깃발을 자신과 근접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둘째 단락에서는 깃발을 다시 손수건으로 비유하였다. 깃발도 천으로 만들어져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니 손수건을 흔드는 모습으로 비유될 만하다. 그런데 그 손수건은 평범한 사물로서의 손수건이 아니라 푸른 바다를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nostalgia의 손수건이다. ‘해원海原’은 바다라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인데 바다라는 말 대신 이 한자어를 쓴 것은 드넓은 공간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푸른 해원’은 생명력이 넘치고 무한히 넓은 동경의 대상을 가리킨다.
깃발은 자기가 원하는 넓고 푸른 세계에 가고 싶어서 끝없이 나부끼는 것인데 깃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그 세계로 갈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자 하는 열망은 멈추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갈망을 가슴에 품고 끝없이 나부끼는 깃발의 모습, ‘영원한 노스탤 첫 행에서 깃발을 ‘이것’이라고 화자와 가까운 대상으로 지칭한 데서도 드러나지만, 이 시는 깃발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낸 것이다. ‘영원한 갈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속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소망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이 제대로 충족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계속 쫓아가도 멀리 달아나 버리는 무지개처럼 인간이 소망하는 세계는 언제나 거리를 둔 상태로 존재한다. 설령 자기가 원하던 것을 얻은 경우에도 사람들은 거기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것을 추구한다. 이처럼 인간의 동경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기에 인간은 깃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어디로 가고 싶어서 아우성치지만 끝내 가지 못하고 무한한 동경만 지니게 되는 존재, 그러면서도 가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모순된 존재인 것이다.
그다음 4, 5, 6행은 구체적 심상을 통해 그러한 생각을 서정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서는 ‘순정’, ‘이념’, ‘애수’라는 세 어휘가 의미의 연쇄를 이룬다. 시인은 물결이 출렁이고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순정도 그렇게 동요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의 순정은 표면적으로는 깃발을 가리키고 내면적으로는 ‘영원한 동경’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푸른 바다로 가고 싶어서 끝없이 나부끼는 갈망의 심정이 곧 순정인 것이다. 그러나 깃발이 매달린 깃대는 요지부동 흔들림이 없다. 그것은 마치 현실의 토대 위에 굳게 뿌리박은 이념처럼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념과 순정은 대립 관계에 있다. 순정은 흔들리고 이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두 측면은 충돌을 일으킨다. 이러한 갈등 속에 슬픔이 싹트는 장면을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표현하였다.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순정’의 나부낌은 ‘이념’의 푯대에 가로막혀 자신의 지향을 실현하지 못하고 존재의 한계를 자각한 데서 오는 슬픔만이 백로가 날개를 펴듯 유동할 뿐이다.
이 시에서 깃발은 인간 존재의 양면성과 실존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어디론가 가고자 하나 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갈 수 없으면서도 계속 가고 싶어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나부끼는 깃발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깃발을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이 깃발을 맨 처음 공중에 단 사람이 누구냐고 탄식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아 누구던가’라는 영탄은 다소 철학적인 시의 주제를 서정적인 정감의 분위기로 감싸 안는다. 그러면서도 이 질문은 인간 존재의 비밀을 엿보고 싶어 하는 시인의 의식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2024.08.21 - [교육/시&소설]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⑤: 백석, 여우난골족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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