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이지 않는 벽
벽에 대한 은유는 여러 시에서 나타납니다. 벽은 대개 극복할 수 없는 제약,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 절망적인 상황 조건 등을 드러내죠. 이 세가지가 모두 결합되어 처절한 상황 속에 있으나, 아비의 잠잠한 눈물로 승화되는 시가 있으니 바로 정지용의 유리창입니다. 자리하고 있지 않은 벽처럼 너머의 별빛도 찬란하게 비춰오는 유리창을 경계로 시인의 감정도 결코 넘어섬이 없어 황홀한 시 유리창을 만나 보겠습니다.
2. 정지용, 유리창 琉璃窓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1930. 1)출전 : 《정지용 시집》(1935). 첫 발표는 《조선지광》
3. 이숭원 해설
① 절제로 시상을 승화한 시인
이 시는 시인이 자식을 폐렴으로 잃은 뒤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정지용을 가리켜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시상의 승화를 보인 시인이라고 평하는데 이 시는 그러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감정의 절제란 막연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드러내되 직접 노출시키지 않고 제삼의 사물이나 정황을 통하여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 환기하는 것을 뜻한다. 감정의 방만한 노출이 때로는 정서의 진실성을 훼손시키고 결과적으로 시의 균형을 깨뜨리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시에서는 감정의 절제를 중요시한다.
② 유리창: 객관적 정황과 주관적 감정 사이
시의 첫 행은 객관적 사물에 주관적 감정이 투영된 상태로 시작된다. ‘유리에 찬 것이 어른거린다’가 객관적 정황의 제시라면 그것을 ‘슬픈것’으로 인식한 것은 주관적 감정의 투영이다. 이 시 전체는 이러한 객관적 정황과 주관적 감정의 상호 이입과 충돌, 균형과 긴장으로 짜여져 있다. 객관적 정황으로 보면 아이는 죽었고 죽은 아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주관적 감정의 측면에서는 아이가 금시 돌아올 것도 같고 유리창에 붙어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도 같고 밤하늘에 별로 떠 있는 것도 같다. 이 객관적 정황과 주관적 감정, 현실과 환상, 죽은 아이와 나 사이에는 투명한 유리창이 가로놓여 있다. 유리창을 매개로 하여 시인은 죽은 아이의 환상을 대할 수 있는가 하면 유리창의 단절 때문에 그 환상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유리창이야말로 환상과 현실을 매개해 주면서 다시 환상과 현실을 갈라놓는 모순된 존재다.
③ 새까만 밤하늘과 별
화자는 유리창에 붙어 서서 입김을 불며 죽은 아이를 그리워한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현실적 조건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시인도 알고 있기에 ‘열없이’(어색하고 겸연쩍게)라는 말을 넣었다. 성에가 끼어 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유리창 밖에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혹시 죽은 아이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입김을 불어 성에를 녹이니 창밖의 무엇인가는 마치 나를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언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 번쩍들어 성에를 입김으로 녹여 지우고 창밖을 더 자세히 보려고 한다. 유리창 밖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화자는 유리창에 붙어 서서 성에를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나 성에 낀 유리창 저편으로 밀려나갔다 다시 밀려드는 것은 새까만 밤뿐이다. 이 새까만 밤은 화자의 절망적 심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새까만 밤하늘 저편에 반짝 빛나는 별이 하나 보인다. 그 순간 아이의 환영이 별에 겹쳐진다. 내 아이가 죽어서 저렇게 하늘의 별로 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러자 눈가에 눈물이 번지며 별은 물먹은 듯 부옇게 흐려져 커 보이고 그 별빛은 ‘반짝’하고 유리창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화자의 가슴에 들어와 박힌다. 아버지의 가슴에 보석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모습으로 자리잡는다.
④ 탄식 뒤에 숨겨진 아비의 떨림
여기서 ‘별’과 ‘새까만 밤’은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시각적 영상으로 대조적으로 나타낸다. 환상을 통해서나마 죽은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순간은 자못 황홀하기까지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새까만 밤’ 같은 더 큰 외로움이 가슴에 밀려든다. 이 이중적 심리를 시인은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라고 표현하였다. 이순간 시인의 외로움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시인은 절제했던 감정의 고삐를 풀어 마지막 탄식을 발한다.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라고. 이 한 번의 마지막 탄식, 마지막 결구의 감탄부 속에, 지금까지 시인의 내부에 응결되어 있던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그리고 그 탄식의 뒤, 마지막을 세로로 종결지은 굳은 감탄부 뒤에는, 새까맣게 얼어붙은, 홀로 남아 외로움에 떨고 있는 시인의 자아가 감추어져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시인이 지닌 고뇌와 안타까움 등 정서의 진정성을 충분히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한 편의 시 작품으로서의 구조적 완결미를 조성하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이런 덕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국 서정시 가운데 백미에 속하는 작품으로 문학사에 기록되는 것이다.
2024.08.20 - [교육/교육과 책. 영화. 사진.]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② -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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