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② -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education guide 2024. 8. 20. 14:06

1.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去者必返)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일단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 말만 떠오르시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면 시험에 주구장창 나왔던 내용이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시로는 님의 침묵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지 않는 시절에 시험 대비용으로 회자정리만 열심히 외웠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저도 다시금 만나보려 합니다.

2. 한용운,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본명 한정옥, 1879 - 1944)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3. 이숭원 해설

시집 님의 침묵의 끝 부분에 놓인 <독자에게>에는 을축년 829일 밤이라는 시점이 밝혀져 있다. 을축년은 1925년이고 절에서는 음력을 사용하므로 829일은 양력 1016일이 된다. 이 시기에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있었다. 님의 침묵이 간행된 것은 1926520일이므로 그는 시집의 원고를 탈고한 다음 그것을 바로 출판에 넘긴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김억의 타고르 역시집 원정신월이 간행된 것이 1924년의 일이다. 그리고 선가禪家의 게송법문을 모아 놓은 십현담十玄談을 주해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가 탈고된 것은 192567일의 일인데 이 날짜도 음력일 가능성이 많다. 그는 십현담주해를 탈고하고 님의 침묵의 시편들을 창작했던 것이다. 불교인으로서 승려 및 신자들에게 읽힐 법문 주해 작업을 끝낸 후, 민족을 위하여 그들의 현실적 고통을 어루만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시의 형식으로 말해 주고자 한 것이다. 요컨대 그는 1925년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일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시를 쓴 다음 그것을 출판한 것이다.

 

한용운이 1879년 생이니 1925년이면 그의 나이 46세 때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40대 중반의 승려가 님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의 시를 집중적으로 써서 서둘러 발표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대중들에게 친숙한 어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는 사랑의 노래를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 것인데, 그 생각은 물론 불교적 사유에 기반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서 대중에게 닥친 가장 절박한 문제가 나라 잃은 민족의 고통이라고 보고, 그러한 민족 현실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정신적으로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불교에서 찾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제시하되 대중들에게 친숙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 시는 시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군말> 다음에 놓인 시집의 첫 작품이다. 시의 첫 행은 사랑하는 나의 님이 떠나갔다는 탄식의 말로 시작한다. ‘푸른 산 빛’, ‘단풍나무 숲’, ‘작은 길은 님이 떠나는 상황의 허전함과 아름다운 님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환기한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라는 시행은 그러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시각적 형상으로 다시 환기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상황의 차이를 대중들에게 분명히 인식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황금의 꽃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깊이 내쉬는 한숨의 바람결에 사라져 버리는 시각적 영상은 이 시의 심미적 가치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다음에 이어지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라는 시행 역시 고이 간직해야 할 추억마저 사라져 버리는 기구한 운명의 비극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미 님의 말소리와 얼굴에 귀먹고 눈먼 화자는 절망의 심연에 갇혀 걷잡을

수 없는 비탄의 나락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역전의 접속어가 나오면서 화자의 생각은 바뀐다. 이별 때문에 울고만 지내는 것은 오히려 사랑을 깨뜨리는 일이다. 화자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여보냄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완성한다. 부정적인 측면만 보면 만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지만 긍정의 시각으로 보면 헤어지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대로 윤회가 거듭되는 것이라면 이승에서 헤어진 사람은 내세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여기서 이별의 슬픔은 재회의 희망으로 전환된다.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다시 만날 것을 믿는미래의 의지로 상승한다.

 

 

이러한 심리의 추이 과정을 거쳐 화자는 비로소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역설적 진실의 각성에 도달한다. 현상적으로는 님이 분명 내 곁을 떠났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나의 내면의 논리 속에서는 님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현실 속의 님은 내 곁을 떠나 침묵하고 있으나, 내 마음은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기에 걷잡을 수 없이 솟아 나오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것이다. 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믿고, 따라서 내 마음은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사랑의 노래가 단절될 수 없다.

 

이것은 억지로 꾸며 낸 감정의 곡예가 아니라 매우 논리적인 사변의 결과다. 그러한 사유에 불교의 가르침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한용운은 불교적 사유에 기반을 두고 시대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길을 불교의 지혜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의 결과는 종교적 편파성에 기울지 않고 보편적 공감의 영역을 확보한다. 종교가 전해 주는 예지는 인류 보편적 지혜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이 시에서 님의 부재라는 현실적 조건을 직시하면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내면의 논리를 시로 표현하였다.

 

2024.08.20 - [교육/교육과 책. 영화. 사진.]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① : 김소월, 진달래 꽃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① : 김소월, 진달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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