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 우리 사회의 해방일지

education guide 2024. 8. 17. 08:41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저/창비/2022

아버지가 죽었다   

 

첫 문장 앞에 작가들도 한참을 서 있고는 합니다.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골라 한마디에 담기 위해서입니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며칠을 고민했다고 하죠. 덕분에 임진왜란의 잔혹함과 민족의 수난사 속에서 우리는 다시 찾아올 봄을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일곱 글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만큼 무겁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의 주제가 있을까 싶은데, 농담 건네듯 툭 하고 던집니다. 마치 남 이야기하듯이요. 그 결과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아버지라는 존재가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지닌 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라는 표현을 볼까요? 대상에 이미 주관적 판단이 개입하여 다른 사람이 뭐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리하지 않아요. 서술자는 아버지의 삶을 일정 거리를 두고 관망하길 원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랑’이란 감정도 떼어 놓고, ‘사회주의’ 같은 이념도 미뤄 놓고, ‘빨치산’이라는 내력도 제쳐 놓고 사람’ 자체를 마주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아버지라는 주인공의 죽음을 첫 문장에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죽음은 이야기의 끝을 의미하죠. 나아가 필연적으로 새로운 주인공을 요구합니다. 곧 이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음 세대인 우리를 위한 이야기입니다.

   

개 이름 같은 이름 '아리'     

 

사람 자체를 마주한다는 것이 그 사람을 구별하여 살피고, 들여다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속한 시·공간과 이를 함께 공유한 사람들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과정이 그 사람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소설은 아버지의 사연과 백아산 일대 사람들의 사연과 지리산 일대 사람들의 사연으로 넓어져 갑니다. 이러한 사연들은 얽히고설키어 딸 고아리로 다시 이어지죠. 개 이름 같은 ‘아리’라는 명칭 속에 백아산의 '아'와 지리산의 '리'를 담아둔 이유입니다. 나아가 아리라는 이름을 통해 허구적인 ‘나’와 실존적인 ‘나’도 아우러지죠. 작가의 이름 정지아, 지리산의 ‘지’, 백아산의 ‘아’. 아리는 작가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요. 

 

여러분, 대한민국 교육의 목표가 무엇일까요? 최근 내어놓은 2022 교육과정은 포용성과 다양성을 가진 주도적인 사람으로 여러분을 길러내야 한다고 정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극심한 분열로 인해 포용성도 다양성도 논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에요. 분단국가인 만큼 이념적으로도 그렇고, 급속한 경제발전을 겪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평가가 줄 세우기를 목적으로 하다 보니 교육적으로도 그렇고... 

 

경계는 선명해지고 틈은 깊어져 가는 사회 속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우리에게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해  여러 생각거리를 줍니다. 

 

 

작은아버지라는 인물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칼날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말’이지요. 일상을 지내다 보면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우리 가슴에 박히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정작 상처 준 이는 스스로 인지 조차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 말을 가슴으로 받아 낸 이는 왜 그 사람이 칼을 던졌는지, 칼의 깊이가 얼마큼인지, 상처가 어떠한지를 수시로 확인하며 고통을 반복해서 겪습니다. 심각할 경우 그 과정에서 아물어야 할 상처가 계속 벌어지고 패여 깊은 흉터로 남습니다. 또한 흉터를 감내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누군가에게 경험의 일부가 되지만, 누군가에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잔혹하게도 스스로가 내뱉은 말이 평생의 칼자국이 되어 버린 슬픈 아이입니다. 심지어 그 말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목숨조차 앗아 갔습니다. 처음에는 그 고통에 눌려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이 반복되며 스스로 상처를 후벼 파던 아이는 왜 본인의 말이 스스로를 향한 칼이 되었는지 따져보았습니다. 단지 어린아이의 가벼운 한마디로 그칠 수 있었던 것이 왜 자신과 아버지와 온 동네를 파괴시킨 원흉이 되어 버린 것인지. 이제 자신의 말 자체보다는 그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존재, ‘문척면당위원장 형’의 존재를 상기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죽을 만큼 괴로웠던 아이는 이제 더 본질적인 원인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빨치산이 아니었더라면… 형이 마을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파국은 생겨나지 않았을 텐데. 동생의 가슴에 꽂힌 칼날이 이제 형을 향합니다.

 

 

 내 살을 후벼 파던 칼날이 빼내니 통증이 줄어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더는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상처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아버지를 루저로 보는 ‘나’도, 그를 형편없는 인물로 분석한 ‘우리’도 어쩌면 조롱하는 이에 속한 자가 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아버지는 어떤가요? 작은 아버지의 칼날 끝에 서 있으면서도 동생에게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았던 아버지. 작은 아버지의 원수로 살면서도 동생을 원수로 생각지 않았던 아버지. ‘니가 그리 잘나서 집안 말아묵었냐?’라며 비난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맞받아치지 않는 이유를 단지 ‘미안해서’라는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동료들의 죽음 한 가운데 서서 울부짖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주검 곁에서 오줌을 지린 채 혼절한 작은 아버지의 고통을 가장 비슷한 수준으로 헤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만약 제가 작은 아버지로 살아왔다면, 이러한 형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미 정신줄을 놓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죽허먼' 인간형

 

 

인천에는 SSG 랜더스필드가 있습니다. 이 구장은 국내 야구장 최초로 관중 친화적 야구장으로 유명합니다. 삽겹살을 구워먹는 야구를 즐기는 장소, 아이들이 뛰놀며 온 가족이 함께 야구를 관람하는 그린존 등 야구 관람에 먹거리 놀거리를 과감히 적용했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관중들이 더 재밌게 즐기고 야구장을 더 많이 찾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계속 읽어 나가게 만들고, 작품 의도에 흠뻑 빠져들도록 여러 장치를 배치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플롯입니다. 인물, 사건, 배경, 시점, 장면 등 소설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결정하여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키고 주제에 다다르게 합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플롯 중 하나가 ’작은 아버지‘의 사연입니다. 형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전면에 배치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반대되는 형에 대한 자부심이 배치됩니다. 그리고 숨겨진 트라우마, ’아버지의 죽음‘이 나타납니다. 형편없는 인간 같았던 작은 아버지가 이제는 ’오죽허먼 인간형‘으로 다가옵니다. 돌이켜보니 영달과 백화도 오죽허먼 인간형들이겠군요.     

 

이러한 플롯은 독자들이 작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나아가 사연을 품은 삶에 대해 생각케 하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여러 사연들의 집합입니다. 완벽히 포용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삶마다 각각의 사연이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시선이 더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천원권과 오천원권이 뒤섞인 지폐, 노인의 돈

제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인데요. 눈 내리던 어느 겨울에 노숙자 한 사람이 교회를 찾아와서는 밥값을 좀 달라 했더랍니다. 목사님은 일단 이리로 좀 앉으세요. 따듯한 치 한잔 드시며 몸부터 녹이시라고 했습니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노숙자 분이 자리를 털고 교회를 나가려 하자 목사님이 서둘러 5천원 지폐를 꺼내 드렸습니다. 그런데 노숙자 분께서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이거 내가 실수했나보다. 액수가 너무 적어 마음이 상하셨나보다. 당황한 목사님이 제가 현금이 없어서 그러니 잠깐만 기다리시라. 금방 오겠다 했더니, 노숙자 분이 이리 답하셨답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돈이 제일 좋을 줄 알았는데 더 따스한 대접을 받은 거 같아서 그냥 갈란다. 라고 했다 합니다. 이 이야기를 스무 살쯤에 들었는데 그 후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도 않고 물리적인 효력도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을 대하는 진심의 가치를 배웠다고나 할까요.     

 

 

저는 돈을 건네고 돌아서는 노인에게서도 아버지를 향한 진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황사장은 그가 진상을 부리자 초상만 나먼 꽁술 잡수러 오는 양반이니 담아 두지 말라 합니다. 실제로 화환을 지팡이로 후려치던 노인은 몸에 술이 들어가자 태도가 돌변하죠. 말끔한 태도로 ‘나의 이름을 부르고 사과를 건네기까지 합니다. 나아가 본인의 형님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버지‘에 덕에 시신도 찾았다는 고마움을 표하죠. 다만, 꽁술을 얻어 먹었으니 이제 순순히 돌아가면 될 텐데 이전에 보기 힘든 행동을 합니다. 바지 주머니를 뒤지더니 천원권 오천원권이 뒤섞인 지폐를 건넵니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는 평소와 다른 목적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평소에 꽁술을 위해 오고 갔던 노인네일지 모르나, 오늘만큼은 술 때문에 온 것이 아닌 셈이죠. 평소와 다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나‘와 나눈 이야기들을 보면 ’아버지‘ 가는 마지막 길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술기운 없이는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노인이었지만, 애써 내민 지폐가 그의 진심을 확인시켜 줍니다. 누군가의 진심은 이토록 사소한 차이에서 새어 나오는 법입니다.

 

아버지식의 위로

 

류시화의 시선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에는 이슬람 철학자이자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의 명시 한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은 ‘봄의 정원으로 오라’입니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 기가 막힌 시입니다. 하지만 저의 뇌리에 한결 더 각인되어 있는 루미의 시는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옳은 일, 그른 일 저 너머에 들판이 있네.

나는 당신을 거기서 만나리.     

 

꽃과 술과 촛불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존귀한 당신, 그런 당신조차도 옳고 그름이란 기준 아래 비교 당하고 판단 받는다면 초라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루미는 기존의 잣대는 내려놓고 저 너머의 들판에서 존재 대 존재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존재 자체를 존중받는 만남은 평안으로 충만한 관계가 됩니다.     

 

아버지식 위로가 대체로 효과가 있었던 것도 당사자들과 들판 위에서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식 위로의 핵심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렇지’는 ‘아무러하다’의 준말로 어떤 것에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 즉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을 들이밀지 않고 상대를 온전히 대함을 뜻합니다. 담배를 피며 방황하는 아이를 대할 때 어른의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한 갑자의 나이 차도 관여치 않은 채 담배 친구로 머물러 주는 것, 오른쪽 검지가 화상으로 뭉그러진 친구에게 어설픈 동정을 건네기보다는 그냥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 주저함 없이 말을 건네는 것, 결국 아버지식의 위로가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상대를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들판의 미덕’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성철 선생님과 장남

 

공동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으로는 “일반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입니다. 혈연처럼 자연적으로 구성되기도 하고, 개인의 가치관과 선택을 기반으로 무리를 이루기도 합니다. 문장에 나타난 좌익과 우익 후자에 해당 되겠네요. 어떠한 공동체든 성장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공동체 의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같은 목적과 공유된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로, 구성원 누군가의 성공이 또 다른 구성원의 성공이 되고, 누군가의 실패는 그만의 책임으로 남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짊어짐을 뜻합니다. 성공의 결실도, 실패의 고통도 함께하는 무리가 본연의 ‘공동체’이지요.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사상적 방향이 달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내가 속한 공동체를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데서 출발합니다. 때문에 그 본질은 총부리를 겨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껴안고 가는데 있습니다. 소성철 선생님의 “좌익 시상이 되먼 니가 자를 봐주고 우익 시상이 되먼 니가 쟈를 봐줘라” 말에는 이러한 인간 사회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분의 아들답게 아들도 그 뜻을 잘 이어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장남의 실천적 행위가 서로를 돌보는 바람직한 공동체의 일면을 확인하게 합니다.

 

떡집언니의 작품 속 역할

 

 

지난 시간에는 작은 아버지의 ‘사연’을 통해 한 사람의 존재를 이해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특별하거나 구체적인 사연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도 다수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떡집 언니’입니다. 레포(연락책)의 딸이자 떡집을 했다는 간단한 배경이 제시되기는 하나 아버지와 얽힌 특별한 사연이나 사건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영화에 빗대자면 주연도 조연도 아닌 단역쯤 되는 인물입니다.

 

잠시 1번 문항을 이어가자면 아버지의 삶이 아름다웠던 것도 머무른 자리에서 공동체의 가치를 잘 실천하고 이루며 살았음에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순경 이야기도 같은 맥락 속에 놓여있죠.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좌익 사람과 우익 사람을 구분하고 경계 짓는 삶을 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 이해라는 주제의 한 축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형상화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그 자체가 공동체의 구현으로 나타납니다. 대개 장례는 고인의 혈연, 특히 직계 가족들에 의해 주도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은 준비-진행-마무리 과정 전반에 있어 딸 아리와 어머니보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식장을 마련하고 절차를 챙긴 것은 딸이 아니라 황사장과 박동식이었고, 부고를 날리고 조문객을 챙긴 것도 박동식과 박한우 선생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음식을 준비하고 챙긴 이 역시 바로 떡집 언니였습니다. 떡집 언니와 같은 인물들의 구성은 가족의 틀을 확장하고 공동체의 본질을 재인식하게 하는 힘을 발합니다. 그리고 그 덕에 좌익 사람, 우익 사람이 모두 어우러진 사회의 일면으로 장례식이 구현됩니다.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열매는 함께 나누고, 짐은 조금씩 나눠지는 사회가 더불어 사는 바람직한 사회라면 그 반대 지점에는 한 개인의 실수나 죄를 따져 묻는 것을 넘어 관련된 이들까지 깡그리 책임 지우며 몇 배 이상의 죗값을 묻는 사회가 있습니다. 바로 연좌제 사회입니다.

여순사건 (출처:미국잡지 LIFE)

“모든 국민은 자기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3항은 위와 같이 규정합니다. 다만 이 조항은 1980년 10월에 제정됨으로써 이전의 우리 사회에 얼마나 연좌제가 만연했는지를 반증합니다. 가족 가운데 월북자나 반체제 인사가 있다면 각종 불이익을 받아야만 했는데 공무원 임용, 육군사관학교 진학 등 국가 관련 기관에는 채용이 불가능했고 여권 발급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작가 이문열입니다. 아버지가 1950년에 월북하는 바람에 경찰을 피해 늘 이사를 다녔고 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건달 생활을 하기도 하죠.

 

작품 속 ‘아리’도 고삼 여름방학에 이 연좌제의 실체를 깨닫습니다. 고3 담임 선생님이 여러 신경을 써 주시지만 자신에게 찍힌 빨갱이의 낙인이 사라질 수 없음을 알고 공부를 작파한 후 밤밭 너럭바위에서 소설만 읽으며 다른 세상 속에 빠져듭니다. 평소 쉽사리 화내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아버지임에도 그러한 그녀를 보고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노기에 찬 얼굴로 호통을 치죠 

 

“언제꺼정 이리 허투루 살라냐! 니 어매가 시방 누구 땜시 저 고상을 허는디…인두껍을 썼으면 니도 밥값은 해야제!” 

 

하지만 이는 오히려 아리가 아버지께 내뱉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자기가 시방 누구 땜시 이 고상을 하느냐고. 인두껍을 썼으면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 길로 반내골을 떠나 서울을 향하고 더는 빨치산의 딸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리라 마음먹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라면 어떤 인생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뜨거운 땡볕을 가볍게 걸어가죠. 하지만 아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이가 자전거를 타고 그녀를 쫓아오죠. 그리고 독한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저주와도 같은 이런 말을 누가 쉽게 내뱉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같은 짐을 진 자만이 건넬 수 있는 말이겠지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生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 무게만해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빨갱이 가족으로서 비롯된 또 다른 무서운 십자가까지 짐 지며 살아왔습니다. 아리의 등에 얹힌 두 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무게를 헤아릴 수도 있었던 것도 그런 까닭일 것입니다. 이쯤 되고보니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끝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리의 해방일지, 작은 아버지의 해방일지, 우리 사회의 해방일지가 되어야 하겠어요.

 

2024.08.15 - [교육/경쟁교육 NO!] - 1. 경쟁교육!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1. 경쟁교육!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고?

우리사회에는 경쟁과 관련한 많은 담론이 있습니다. 시중에는 ‘경쟁 없는 교실엔 경쟁력이 없다’라며 경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도 있고, 반대로 경쟁으로는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고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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