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④: 이상, 거울

education guide 2024. 8. 21. 13:27

 1.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헤아리기 힘든 길은 바로 사람 속입니다. 그리고 그 길 가운데서도 유독 변모가 심하고 끝을 내다보기 어려운 길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나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명료한 선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죠. 이상의 시 거울은 이러한 어려움을 다룹니다. 거울을 통해 사실상 마주하기 어려운 '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 이상, 거울 

 

이상(김해경,  1910-1937 향년 26 세 ), 경성고공 졸업 기념 사진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幄手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마는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속의 나를 만나 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事業에 골몰할게요

 

거울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反對요마는

또 꽤 닮았소

 3. 이숭원 해설 

이상은 당시의 문학적 인습에 반기를 든 반항아였다. 그는 시에서 일상적 의미의 사용을 거부하고 역설과 반어를 구사하여 의미의 다층성을 추구하려 했다. 그의 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의미를 탐색케 하고 무슨 의미인가를 놓고 고민하게 하는 시.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계속적인 사색의 긴장을 요구한다. 이 시에 띄어 쓰기를 하지 않은 것도 기존의 일상적 언어 규범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이 시의 중심 제재이자 제목인 거울은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속성을 갖는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사물이 실재의 사물과 똑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좌우가 반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상은 이 점에 착안하여 현대인의 자아가 둘로 분열된 모습을 거울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우선 1연과 2연에서 이상은 거울 속 세계의 특징인 소리의 단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재의 세계에서는 여러 가지 소리가 전달되지만 거울속의 세계는 침묵이 유지될 뿐이다. 거울 밖의 를 현실적·일상적 자아라고 한다면 거울 속의 는 내면적·무의식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 둘은 거울 면을 축으로 두 쪽으로 나뉘어 있는데, 하나는 소리가 울리는 세계에, 또 하나는 소리가 단절된 세계에 존재한다. 현실적 자아가 내면적 자아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려 해도 침묵의 세계에 속해  있는 내면적 자아는 현실적 자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겉으로는 나와 똑같이 두 개의 귀를 갖고 있지만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일 뿐이다. 요컨대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는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3연에서는 소리의 문제를 넘어서 접촉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좌우가 반대로 비치는 거울 속의 나는 내 악수를 받을 수가 없다. 분명히 나와 같은 모습인데 나와 악수를 나눌 수 없는 단절된 존재가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는 이렇게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두 자아가 직접 접촉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거울을 통해 또 하나의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통의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비쳐서 모양을 단장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상의 거울은 우리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거울을 통한 내면적 자아의 발견은 문학적 주제로 매우 독창적인 것이고 이상은 그러한 독창적 주제를 시로 표현한 문학사적 공적을 지닌다.

 

5연에서 화자의 관심은 거울이라는 가시적 사물의 영역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늘 내가 있는데 거울을 보지 않으면 거울 속의 나는 어디로 사라지는가? 이상이 거울을 통해 본 자아는 내면적·무의식적 자아이기에 거울로 보건 안보건 그 ‘나’는 일상적 자아의 내면에 잠재해 있다. 우리가 꿈을 꾸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우리의 잠재된 욕망이 무엇인가를 통해 표출된다고 한다. 꿈속에서 우리의 잠재된 욕망은 내면적 자아를 매개로 여러 가지

사건을 펼친다. 그래서 이상은 거울 속의 내가 자신만의 사업에 몰두해 있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이다.

 

이상, 미술반 습작실에서

 

바람직한 것은 실재의 나와 거울 속의 나, 다시 말하여 현실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가 비교적 긴밀하게 합치되어 하나의 모습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현대 생활을 영위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행하는 일과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겪게 된다. 어떤 때에는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권총으로 사람을 죽인 주인공 뫼르소는 왜 죽였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 때문에 죽였다는 엉뚱한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극단적인 예지만,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현실의 나는 무의식 속의 내가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할지 알지 못한다.

 

과연 내 본모습이 무엇이며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거울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診察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라는 이상의 진단은 바로 그러한 인간 존재의 고립감과 불가해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상은 거울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자기 확인이라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시로 제기한 선구적인 시인의 자리에 놓인다. 어떻게 보면 장난스럽기도 한 이상의 시는 그러한 심각한 주제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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