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감는 이유
누구나 어려운 시기를 겪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의 고난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죠. 때로 고난은 우리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시련 속에서 우리는 더 강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기 때문이죠. 힘든 순간일수록, 그 고난을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육사가 눈 감아 생각해 보는 까닭도 새로운 눈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2. 이육사,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1940. 1).출전 : 《육사시집》(1946). 첫 발표는 《문장》
3. 이숭원 해설
이 시를 쓸 당시 이육사는 서울로 이사하여 문필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는 마치 북만주의 체험을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연보에 의하면 그가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로 만주와 북경 등지에 체류한 것은 1931년에서 1933년 사이였고 1934년에 이 일로 옥고를 치른 일이 있다. 시인은 과거의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적 재구성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시를 썼을 때 시인이 북만주에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1연에서 화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매운 계절의 채찍’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뜻하는 말일 텐데 추위에 쫓겨 간 곳이 더욱 추운 북방이라는 데 이 시의 아이러니가 있다. 즉 현실의 시련 때문에 이 시의 화자는 더욱 형편이 좋지 않은 곳으로 내몰린 것이다. 겨울이라는 시간과 북방이라는 공간은 죽음이나 소멸과 관련된 말인데 이 둘이 겹친 상태니 화자는 그야말로 죽음과 마주한 절박한 지점에 선 것이다. ‘마침내’라는 말은 예감했던 일이 결국 실현되었다는 어감을 갖는다. 현실의 억압이 가중되어 오면서 최악의 상태를 예감했는데 결국 그런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최악의 상태는 2연에서 하늘의 소멸로 상징화된다. 하늘은 해와 달이 떠오르는 곳이고 빛이 온 세상에 퍼지는 공간이다. 이런 뜻에서 하늘은 겨울이나 북방과 대립되며 광명의 세계와 통한다. 그런데 그 하늘이 그만 지쳐서 끝났다고 했으니 이것 역시 생명의 종식, 희망의 압살을 뜻한다. 하늘이 사라져 버린 고원高原은 높이 올라가는 고역만 남고 그것의 기대치인 희망은 사라진 공간이다. 화자는 절망의 광야, 죽음의 폐허 위에 놓여 있다. 더군다나 그 고원에 서릿발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돋아 있고 화자는 그 위에 서 있다고 했으니 이제는 절망의 단계를 넘어서서 시련과 고통의 절정으로 휩쓸려 가는 것이다.
이러한 처절한 상황 속에서 자아는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하고 생각한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상황에서 고통의 절정에 선 자아가 무릎을 꿇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릎을 꿇는다고 하면 흔히 굴복을 떠올리는데 굴복할 사람이라면 북방으로 휩쓸려 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서릿발 칼날 진 곳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다음 행에서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다고 했으니 굴복이라는 해석은 그다음 행과의 의미론적 연계성도 지니지 못한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여 극한적 위기의식을 느낄 때 자신의 힘을 넘어선 어떤 존재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 대상은 절대자가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일 수도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마르크스 사상이 그가 의지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민족주의자라면 민족이 그를 지탱케 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화자는 삶의 가혹한 고비에 처하여 극렬한 위기의식을 느끼며 무엇인가에 의지하여 자기의 힘든 몸을 쉴 곳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잠시 무릎을 꿇고 안식을 얻으려 했으나 어디에도 자신이 몸을 기댈 곳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한 발 제겨디딜 곳 조차 없다“는 말은 그러한 상황 인식을 나타낸다. 여기서 그의 절망과 고통은 더욱 강화된다.
절망과 고통의 절정에서 어디에 의지하거나 위안을 얻을 곳도 찾지 못한 자아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육사는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라고 노래하였다. 이 부분은 난해한 비유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었다. 첫 구의 ‘이러매’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인식해 보았다는 뜻이다. 즉 절망과 고통의 절정, 위기의 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고 생각해 보는 것, 다시 말하면 내면의 명상을 통하여 현실을 재구성해 보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뜻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자신의 실제적 힘으로 고통스런 현실에 대처할 방법이 없을 때 위기에 처한 자아는 환상을 통하여 현실을 바꾸어 보려 하는 것이다.
그 환상의 내용은 다음 행에 제시되어 있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것이 그 환상의 내용이다. 여기서 ‘무지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육사의 시에서 무지개는 현재의 상황을 다른 세계와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무지개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해 주는 공간 표상으로 설정되고 있다. <절정>의 경우에도 무지개의 의미는 그대로 투영된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할 때 그 의미의 중심은 ‘겨울’(현실)과 ‘무지개’(다른 세계)에 있다. 전후의 문맥을 고려하여 이 구절을 읽으면, 자신이 처한 암담한 현실도 눈 감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지개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여기서 무지개는 고통에 갇힌 자아를 다른 세계로 이행시켜 주는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시련과 고통에 직면한 자아가 밟고 넘어야 할 이행의 공간이 무지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겨울이 무지개라는 것은, 암담한 현실이 시인의 환상 속에서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밟고 넘어야 하는 단층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런데 아무리 환상 속에서지만 그 고통스런 현실이 아름다운 무지개로 떠오를 수는 없었다. 결국 ‘강철’처럼 차갑고 딱딱한 형상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독법에 의하면 강철은 겨울의 불모성, 냉엄성, 폐쇄성을 환기한다. 즉 이육사는 겨울로 표상되는 암담한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강철처럼 견고한 상태로 파악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의지를 통하여 그것을 밟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위기의 극한에 처한 자아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현실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환상을 통하여 현실의 시련을 극복할 것을 꿈꾼 것이다. 이 두 갈래의 인식이 교차하면서 ‘강철로 된 무지개’라는 미묘한 어구를 창조해 냈다. 이처럼 미묘한 내면의 움직임을 표현한 시구이기에 그 역설의 어법이 독자들을 더 큰 상상의 영역으로 유도하는 것인지 모른다.
2024.08.22 - [교육/교육과 책. 영화. 사진.]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⑦: 이용악,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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