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⑨: 서정주, 국화 옆에서

education guide 2024. 8. 23. 15:38

1.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세계

 

세상은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사람들이 내딛는 발걸음, 속삭이는 말, 따스한 손길 하나하나가 씨실과 날실로 엮이어 인생이라는 무늬를 만들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를 향한 깊은 연결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갑니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전 우주에 울림을 주는 모습이 이 시에 담겨 있습니다. 바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입니다.

 

2. 서정주, 국화 옆에서

서정주(1915-2000, 향년 85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출전 : 《서정주 시선》(1956). 첫 발표는 《경향신문》(1947. 11. 9).

 

3. , 국화 옆에서

이 시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서정주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이 시에 대해 시인의 개인적 이력과 관련지어 일본 천황을 찬양한 시라는 둥, 이승만을 찬양한 시라는 둥 근거 없는 폄하의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에게 매우 친숙한 불교의 연기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현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표현한 순수한 작품이다. 이 시에는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생태학적 사유에 해당하는 독특한 융합의 상상력도 담겨 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는 천둥이 먹구름 뒤에서 울었다는 상상 자체가 만물의 유관성有關性을 인정하는 태도. 즉 세상 만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태도다. 한 송이 국화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쩍새의 울음, 천둥의 울음과 관련되어 있고 그러한 시련과 고뇌의 과정 속에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인식이 이 시에 담겨 있다.

 

이러한 발상은 비단 국화꽃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해당한다. 들판에 흔들리는 무수한 이름 모를 풀꽃들도 모두 평등한 가치와 오묘한 생명력을 갖춘 존재들이다. 풀잎 사이로 기어 다니는 벌레들, 땅에 묻혀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들까지도 귀중한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많은 요소들이 질서 있게 결합하고 그 나름의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생명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3연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이란 말은 물론 누님에게 해당하는 수식어지만 봄날의 소쩍새의 울음과 여름의 천둥의 울음에 관련된 말이기도 하다. 소쩍새가 우는 소리는 매우 처연해서 사람의 마음을 아릿하게 자극하고 먹구름 낀 하늘에 천둥이 우는 소리도 사람에게 다가오는 음산한 시련의 시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국화꽃이 피는 데에는 그런 시련과 고뇌의 과정이 있었음을 자연현상을 통해 나타낸 것이다. 시인은 국화꽃을 자신의 누님에 비유하였다. 젊음의 뒤안길을 거쳐 거울 앞에 선 누님은 젊음의 방황과 시련을 거쳤기에 인간사의 자잘한 아픔을 이해하고 웬만한 것은 다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철없는 사랑놀음이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을 관조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는 평정심을 누님은 지녔을 것이다. 그런 누님과 국화가 동일화된다는 것은 국화를 그런 정신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정신의 한 경지를 보여 주는 누님과 국화라는 자연물이 동등한 위상에 놓이게 된다.

 

4연에서 시인은 국화꽃을 자신의 생활 체험과 관련지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은 우주 만물의 상의성相依性과 유관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의 존재들은 상호 작용을 한다. 서리 내린 밤과 불면의 밤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화꽃이 피어나는 생명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에 동조하고 호응하는 필연적 관계로 맺어진다. 그래서 서리 내리는 자연현상과 잠들지 못하는 인간의 고민이 국화를 매개로 하여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진다.

 

2024.08.23 - [교육/교육과 책. 영화. 사진.]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⑧: 이육사, 절정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⑧: 이육사,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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