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⑩: 윤동주, 소년 少年

education guide 2024. 8. 24. 23:37

 1. 순수로 나를 돌이키고 싶을 때

 시는 마음의 투영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쓴 시는 읽는 이의 마음마저 맑고 투명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고단하고 심사가 복잡할 때 이런 시를 감상해 보세요. 스며드는 순수로 내면의 소음은 사라지고 고요한 평온으로 나를 물들일 수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는 맑고 순수한 정서가 담겨 있고 인간의 순수함과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이 전해지며, 투명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대개 그의 대표작 '서시'를 기억하지만 소년이란 시도 잠시나마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2. 윤동주, 소년 少年 

 

윤동주(1917-1945, 향년 27세)

 

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1939)

 

출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3. 이숭원 해설 

이 시를 읽으면 윤동주가 얼마나 해맑은 감성을 지닌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저항 시인이라는 선입견에 가려 보지 못했던 윤동주의 온화한 내면과 유연한 감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맑은 마음과 순정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어두운 현실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했음, 그리고 결국은 시대의 질곡 속에서 죽음의 길로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순수한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순결한 자아의 존재가 지속될 수 있겠는가.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가을이다. 제목인 소년은 순정한 마음을 지닌 화자의 나이를 가리킨다. 마치 이런 순정한 마음은 소년 시절에만 유지된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의 삶은 타락한 세계에 점점 길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소년은 단풍잎이 떨어지는 가을날 자기가 좋아하는 순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호소한다. 가을의 계절감은 소년의 사랑의 감정을 영롱하게 채색해 준다.

 

단풍잎이 떨어지는 것을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떨어진다고 표현한 데는 소년의 사춘기적 애상의 감정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풍부한 정감도 반영되어 있다. 단풍잎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시간은 흐르고 이 아름다운 가을도 아쉬움만 남긴채 지나가고 말 것이라는 허전한 심사가 이 시행에 응결되어 있다. 단풍잎 떨어진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았다고 한 것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청년 윤동주의 긍정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이것은 소년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단풍잎 떨어진 자리에 봄이 마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 위에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윤동주는 이렇게 섬세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있다.

 

 

 

소년의 천진한 생각은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붉은 단풍잎과 푸른 하늘의 시각적 대조를 넘어 이룩되는 푸른 물감의 환상이다. 가을 하늘이 너무도 파랗기 때문에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나고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고 했다. 여기서 시인은 따뜻한 볼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기에도 청년 윤동주의 온화한 심성이 드러난다. 눈썹과 두 볼, 손바닥까지 파랗게 물들자 이제 손바닥에는 맑은 강물이 흐른다. 이 상상력의 변화 과정은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볼 만하다.

 

푸른 하늘이 푸른 눈썹으로, 푸른 눈썹이 다시 푸른 손바닥으로, 그것이 다시 푸른 강물로 바뀌는 전환의 심상은 그 이전에 우리 시사에서 접한 바가 없다. 이렇게 신선한 시적 감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학습이나 수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윤동주의 맑은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리라.

 

윤동주의 상상의 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손바닥에 떠오른 푸른 강물의 심상은 사랑하는 순이의 얼굴로 전환된다.  ‘사랑처럼 슬픈 얼굴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절묘한가. 진정한 사랑은 슬플 수밖에 없는 것, 사랑은 그 안에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임을 스물두 살의 청년 시인 윤동주는 이미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던가 보다. 이렇게 무능하고 무력한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당신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 정직한 사람은 슬퍼진다. “ 소년은 황홀히눈을 감아 본다 고 했다. 혹시 황홀히 눈을 감아 본 기억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주체할 길 없는 격정에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 윤동주는 순정한 감성으로 이러한 체험을 상상적으로 구성하여 시로 표현하였다. 이 구절을 쓴 윤동주야말로 진정한 사랑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거짓된 시대에 어떻게 참된 사랑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화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계속 강물에 비친다고 했다. 이것 자체가 시대의 모순이며 시인 자신의 내면의 모순이었다. 윤동주는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순수한 사랑을 꿈꾼 것인데 그 의식 자체에 이미 비극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2024.08.23 - [교육/교육과 책. 영화. 사진.]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⑨: 서정주, 국화 옆에서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⑨: 서정주, 국화 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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