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공한 사업가. 그러나 시인으로 기억해 주길.
김광균은 시인으로도 유명하지만 사업가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두고 이런 말들을 합니다. “그가 기업에 투신하지 않고 계속 시업에 몰두했더라면 우리나라의 현대시문학사는 얼마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1950년 6.25전쟁 때 동생이 납북되고 그는 사업을 떠맡게 되는데 그가 이끈 ‘건설실업’은 성장을 거듭해 6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는 무역협회 부회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7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죠. 그의 시적 재능을 아까워한 문단의 친구들은 틈틈이 시를 쓰라고 권유했다고 하네요. 후에 그는 자신의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업은 생계를 위해 종사했을 뿐, 사업가가 아닌 시인으로 기억해 달라고...
2. 김광균, 추일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筋骨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 7).출전 : 《기항지》(1947). 첫 발표는 《인문평론》
3. 이숭원, 해설
이 시의 첫 행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구절은 널리 알려진 명구다. 이차세계대전 때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는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이미 타국의 지배하에 떨어진 폴란드이기에 그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지폐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낙엽은 마치 그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아무 가치 없는 존재가 되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닐 뿐이다. 또한 폴란드의 문화 유적이 많은 고도古都도룬 시는 폭격을 맞아 그 아름다운 고풍을 잃어버리고 폐허가 되었다. 가을의 황량한 풍경은 바로 그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한다는 것이다.
이 시의 첫 부분에 이러한 외국 지명을 사용한 것은 이국정조를 통하여 가을 풍경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말하자면 이 시인은 기존의 시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가을의 정경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 의도에서 이국정조와 결합된 비유의 어법을 구사하게 된 것이다. 그다음 4, 5 행도 당시 시의 표현 수준을 한 단계 높인 비유이다. 길을 구겨진 넥타이로 비유하고 햇빛을 폭포로 비유하는 수법은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이 점에서 김광균은 1930년대 시단에서 새로운 비유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전개되는 시행들은 하나의 풍경화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낙엽은 덧없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그 위에는 황량한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다. 햇빛이 폭포처럼 내리비치는 들판 끝으로 구불구불한 길이 사라져간다. 들판 위의 철길로는 연기를 뿜으며 오후 두 시의 급행열차가 달린다. 포플러나무는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아 있는데 그 앙상한 가지사이로 공장이 하나 보인다. 공장의 지붕은 페인트가 벗겨졌는지 흰빛이 드러나 있고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껴 황량함을 더해 준다. 그 위 하늘에는 셀로판지로 만든 것 같은 얇은 구름이 걸려 있다.
여기까지는 풍경을 묘사하였을 뿐 화자의 감정이나 발언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그 풍경은 회화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풍경이 환기하는 감정의 윤곽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이 화자의 언술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 시행부터는 화자가 전면에 등장하여 자신의 행동도 서술하고 감정도 드러낸다. 자욱한 풀벌레 소리를 발길로 찬다는 표현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바꾸고 무형의 것을 유형의 것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법이다. 풀벌레 소리 들리는 풀밭 길을 거니는 화자의 심정은 고독하고 허전하다. 지금까지 가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들길을 거닐던 화자는 자신의 스산한 심사를 주체할 길이 없어 허공에 돌팔매를 띄운다. 그러나 그 돌팔매도 자신의 심정을 반영하는 듯이 ‘고독한 반원’을 긋고 풍경 저쪽으로 사라져 간다.
이 시는 제목 그대로 가을날의 정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정서를 직접 제시하지 않고 가을의 이모저모를 보여 준 다음 끝 부분에 가서 자신의 고독과 황량함을 드러내었다. 풍경 저쪽으로 던진 돌팔매의 움직임은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을 나타내는 듯하다.
허공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은 공중으로 날다가 결국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인간도 그와 같이 어떤 욕망과 의지를 가지고 상승하다가 종국에는 좌절의 늪으로 하강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돌의 움직임이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보여 준다는 것은 우리의 해석이고 시인 자신은 그런 생각 없이 그저 고독한 내면의 움직임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해 보려는 의도로 그런 시행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러면 가을의 고독한 감정은 우리의 삶과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시인은 가을의 쓸쓸한 정경을 제시한 다음 자신도 그와 같이 고독한 처지에 있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 시는 비유에 의한 가을 풍경의 표현, 회화적 이미지를 새롭게 구사하여 가을 풍경을 신선하게 재구성한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시각적으로 포착되는 회화성은 아름다우나 그 회화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색의 힘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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