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로 만나는 평화로운 경험
박목월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입니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마치 조용한 자연 속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깊고 평화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외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낭만적 유랑의식을 그의 시 ‘나그네’로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박목월,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삼백 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1946. 6).출전 : 《청록집》
3. 이숭원, 해설
이 시는 일제 말에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시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대해, 일제 말기에 쓴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그당시 농촌의 피폐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이라고 미화한 것은 당시 현실을 왜곡한 표현이라고 비판을 가한 경우가 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것이 그 당시 농촌의 실상이었을 텐데 어디에 술 익는 마을의 풍요로움이 있었겠느냐는 것이 비판의 골자다. 이것은 한마디로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비판이다. 이것에 대한 반론으로 <나그네>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머리에 떠오른 이상적 현실의 모습을 담아놓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부당한 비판에 대한 어설픈 변론에 불과하다.
과연 <나그네>가 일상적 현실이 아니라 이상적 현실의 모습을 모방한 것인가? <나그네>의 전체 시행도 그렇고 마지막 구절도 그렇고 그것을 이상적 현실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외줄기 길을 표표히 걸어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모습, 그 나그네가 걸어가는 저녁 무렵의 노을과 무르익은 술 등이 낭만적 정취를 풍기기는 하지만 그것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이상적 세계의 모습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남도 삼백 리 길을 유랑이나 하면서 술잔이나 기울이는 것이 어떻게 이상적이고 가치 있는 삶이란 말인가. 이 시의 정경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시인 자신이 한순간 떠올렸던 낭만적인 상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리 참담한 상태에서도 사람은 아름다운 꿈을 꿀 권리가 있고 낭만적인 몽상을 즐길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이 현실의 고통을 조금 덜어 주기도 한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신음으로 가득한 시만 쓴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살벌할 것인가.
이 시는 단적으로 말해서 음악성을 추구한 시다. 박목월은 자신의 초기 시작 과정을 설명하면서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나 한 줄의 시상을 설정해 놓고 운율미와 음악적 효과를 고려하여 전체 시를 구상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시를 지배하는 것도 바로 시어와 그것의 음악적 효과에 대한 관심이다. 여기 나오는 시어들을 보면 거의 모든 시어가 유성음으로 되어 있다. ‘익는’처럼 자음이 나오는 경우에도 발음할 때는 유성음으로 동화되고 앞에 ‘술’이 연결되면 이 대목의 음악적 울림은 더욱 고조된다. 격음은 ‘타는’에 딱 한 번 나오는데 이 말은 저녁놀이 붉게 물드는 정경을 강하게 나타내야 했기에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의미 구조보다 음성 구조가 더 상위에 놓인 작품이다.
요컨대 이 시는 유성음의 연속에 의해 유유한 흐름을 보이는 음악적 선율과 나그네의 유유한 유랑의 모습이 정연한 일치를 보이도록 구성한 심미적 구조에 중점이 놓인다. 시어 하나하나는 음악적 울림을 충분히 함유하면서 그것을 적절히 분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단어 하나라도 다른 것으로 바꾸면 시의 가치는 반감되고 만다. 예를 들어 ‘강나루’를 ‘강언덕’으로 바꾸거나 ‘밀밭’을 ‘뽕밭’으로 바꾸어 보라. 시가 아주 이상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시어와 운율의 음악적 효과가 시 전체를 이끌어 가는 작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의 느긋한 운율감에 동승하여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유연하게 흔들리면서 ‘외줄기 삼백 리 길’을 걸어 저녁놀이 타오르는 술 익는 강마을로 접어들면 되는 것이다. 외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낭만적 유랑의식을 스스로 체험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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