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마다 다른 꽃을 피우는 시
김춘수의 ‘꽃’은 누군가에는 철학적 물음을 담은 시로, 누군가에는 사랑의 시로, 누군가에는 자아실현의 시로 받아들여집니다. 해석의 폭이 넓고 그만큼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시죠. 한 편의 시가 시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른 꽃을 피우게 만든다고 할까요. 한번 감상해 보시죠.
2.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출전 : 《꽃의 소묘》(1959). 첫 발표는 《시와 시론》 (1952)
3. 이숭원, 해설
청소년들에게도 널리 애송되는 이 시는 사랑의 시로 읽힐 만한 요소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를 존재론적 의미를 담은 작품으로 해석한다. 이 시의 전개는 기승전결의 논리적 구성 방식을 따르고 있다. 1연의 생각이 2연에 이어지고 3연에서는 생각이 다시 전환되고 그 전환된 생각은 4연으로 이어져 종결된다. 1연에 제시된 그의 ‘몸짓’은 2연에서 ‘꽃’으로 발전되고, 여기서 확인된 사실을 근거로 하여 3연에서 나의 경우로 의미가 전이되어 나도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후, 4연에서 우리 전부의 보편적 맥락으로 의미가 확대되면서 시가 종결된다. 요컨대 나와 그의 관계에서 생각이 도출되어 그와 나의 관계로 생각이 전환되고 다시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발전되면서 시가 종결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꽃은 실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관념을 대변하는 추상적 존재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하나의 희미한 몸짓에 불과했던 대상이 이름을 불러 주자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그 대상을 자신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아이가 새로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 주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면 그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모두 이름을 통해 타자를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려는 행위다. 상대방을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어 한다.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남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욕망이다. 이 시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욕망을 쉬운 언어와 간결한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인간의 욕망이 발산되는 측면은 다양하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이 시를 구애의 시로, 사물 탐구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은 존재 탐구의 시로, 삶의 현실적 측면에 몰두한 사람은 자기실현의 시로 읽게 된다. 이처럼 이 시가 지닌 의미의 진폭은 크게 확장된다. 기승전결의 논리적 구성에 의해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욕망을 다루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고 그래서 많은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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