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감정보다는 책임감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우리가 부모의 위치에 설 무렵이 되면 ‘나’의 많은 부분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깨닫죠. 김종길의 성탄제는 이러한 발견을 담고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2. 김종길, 성탄제 聖誕祭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 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955. 4).출전 : 《성탄제》(1969). 첫 발표는 《현대문학》
3. 이숭원, 해설
이 시에 담긴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가 한 마리 짐승처럼 고열로 보채고 있고 그 옆에는 어머니 대신 할머니가 초조하게 아이를 지키고 있다.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는 손이 귀한 집안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어두운 방 안에 핀 숯불은 잦아드는 한 생명을 지키는 수호의 불빛이자 신열에 들뜬 아이의 붉은 얼굴빛을 이중적으로 투영한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눈길을 뚫고 아버지가 약을 구해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가 구해 온 약은 뜻밖에도 붉은 산수유 열매다. 이렇다 할 약이 없는 산골인지라 아버지는 눈 속을 헤치고 다니며 겨울 숲에 남아 있는 산수유 열매를 따 온 것이다. 산수유 열매는 민간요법에서 해열제로 쓰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들은 열이 내리고 목숨을 건졌는데 산수유 열매가 약효가 있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아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눈 속을 헤매고 돌아다닌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산수유 열매의 붉은 빛깔로 형상화되어 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어린 아들은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어 “서러운 서른 살 “이 되었다. 모든 것이 변하여 “옛것이란 찾아볼 길 없는"상태다. 다만 옛날과 다름없이 한겨울의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다. 화자는 눈을 “반가운 그 옛날의 것 “이라고 표현했다. 눈을 보면 자신이 목숨을 건진 그날이 떠오르고 눈길을 헤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이 느껴진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모든 것이 바뀌는 염량세태炎凉世態, 그 가변적 현실 속에서도 하얀 눈과 서늘한 옷자락은 조금도 변함없는 생생한 감각으로 화자의 마음에 각인된다. 가변적 현실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것, 그것은 아버지가 보여 주신 사랑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담은 산수유 열매 붉은빛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화자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나에게 이어진다면 나의 마음은 그다음 사람에게 이어질 것이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세대를 넘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이 시의 주제를 이룬다. 이 시는 외적 상황과 내적 심정을 장면의 교차와 행간의 여백을 통해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붉은 산수유 열매’나 ‘서느런 옷자락’등의 감각적 심상을 구사하여 충분히 세련된 현대적 표현 기법을 살려 내고 있지만, 여기 담긴 의식의 측면은 전통 지향적 정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제목인 ‘성탄제’는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물의 역할을 한다. 성탄제에는 눈 내리는 겨울의 이미지와 생명 사랑의 의미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2024.08.27 - [교육/시&소설] -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⑮: 김춘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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