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력과 신비로 가득찬 세계
박두진의 시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찬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명력과 신비로 가득 찬 존재로 묘사하며,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생명의 힘과 숭고함을 표현하려는 시인의 노력은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여기서는 그의 대표작 ‘해’를 만나 보겠습니다.
2 . 박두진,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출전: 《해》 (1949)
3. 이숭원, 해설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인 박두진은 조지훈, 박목월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낼 때 자연의 형상을 끌어들여 표현하였다. 미래의 희망이나 현실 극복 의지를 나타내는 경우에도 자연은 늘 표현의 매개체로 등장했다. 시인의 기독교적 평화주의는 산과 하늘과 꽃 같은 생동하는 자연 정경을 통해 제시되었다. 이 시도 해가 솟는 자연현상과 자연친화적 상상력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이 시의 약동하는 율동은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떻게 보면 지루하게 보이는 “해야 솟아라“라는 말의 반복은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울림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만일 조국 광복의 상황이 아니라면 이 시에 그렇게 큰 공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현실적 상황 때문에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라는 평범한 표현도 뚜렷한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일제 강점기 어둠의 시대가 가고 광명의 시대를 맞이했다는 가슴 설레는 감격의 정조가 이런 시를 창작하게 한 것이다. 광복의 하늘에 새롭게 솟는 태양이기에 “앳된 얼굴 고운 해 “라고 표현했다. 마치 귀여운 아이처럼 앳되고 고운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는 해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밝은 해의 이미지는 어두운 달밤과 대립되고 청산과 호응한다. 푸른산은 온갖 생명체들이 조화를 이루는 평화와 안식의 공간이다.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라는 말에는 모든 생명체들이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드넓은 포용의 공간이 곧 산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곳은 순한 사슴과 사나운 칡범이 제각기 자신의 생명력을 드러내면서 공존하는 공간이다. 화자는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논다는 말을 통해 모든 생명과 차별 없이 어울리고 싶다는 기독교적 평화주의와 박애사상을 드러낸다. “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라는 말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 속에는 인간의 고독도 자리 잡지 못하며 화해의 기쁨만 넘칠 뿐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동물만이 아니라 꽃, 새, 짐승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대동화합의 결속을 이루는 꿈의 공간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것을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이라고 말한 것이 이채롭다. 여기에는 자신의 소망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모든 존재가 차별 없이 하나로 화합하는 이상적 세계가 우리 역사에 실현된 적이 없기에 시인은 그러한 이상적 상태를 “앳되고 고운 날“이라고 표현했다. 신석정은 <꽃덤불>에서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이라는 동적인 이상향을 꿈꾸었는데 박두진은 어린애처럼 천진하고 어여쁜 희망의 새날을 꿈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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