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희덕
충남 논산 출생으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모성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고 생명의 원리를 추구하는 서정적인 작품을 주로 창작하였다. 시집으로 『뿌리에게』(1991), 『어두워진다는 것』 등이 있고, 998년 제17회 ‘김수영문학상’, 2001년 제12회 ‘김달진문학상’, 제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학 부문,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2005년 제17회 ‘이산문학상’, 2007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2010년 제10회 ‘지훈상’ 등의 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2.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열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상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뜰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출전: 『어두워진다는 것』(2001)
3.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화자가 ‘복숭아나무’라는 대상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처음에 화자는 복숭아나무가 너무나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것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화자는 복숭아나무를 멀리 지나치기만 하고 둘 사이의 만남이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본 복숭아나무의 눈부신 빛깔 때문에 그 나무가 흰색과 분홍색 두 가지의 빛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복숭아나무에 대해 가진 편견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게 된 것이 오히려 복숭아나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복숭아나무가 가진 수천의 빛깔을 확인한 화자는 복숭아나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수천 가지 빛깔을 가진 복숭아나무는 그 빛깔만큼 피우고 싶은 꽃빛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피우고 싶어 하는 꽃빛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복숭아나무는 그 외로움을 이겨 내고 수많은 빛깔을 내 보이는 것에 만족해 한다. 화자는 이러한 복숭아나무의 모습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화자는 자신의 편견 때문에 그 마음을 읽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하며 멀기만 했던 복숭아나무에 대한 접근을 위해 복숭아나무의 그늘로 들어간다. 복숭아나무의 마음을 읽은 후의 그 그늘은 화자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화자는 그늘 속에 들어가 복숭아나무의 외로움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된다. 복숭아나무의 세계를 의미하는 그 그늘 속에서 화자와 복숭아나무는 완벽한 이해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4. 참고자료 <가깝고도 먼 부모님께 드리는 시>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 연무대의 에덴원이라는 보육원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종교적 이상에 따라 시인은 고아들과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다. ‘고아 아닌 고아’로 보육원에서 부모 없는 외로운 아이들과 함께 자란 시인은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님이 가족보다는 불우했던 이웃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더 많이 쏟아 부었던 것을 시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부모님이 처음에는 너무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 그 삶을 닮으려 할 수 없다고 멀리 지나치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지닌 여러 겹의 마음을 읽게 된 시인이 마침내 부모님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서 저녁이 오는 소리를 함께 듣는다. 이 시는 늘 가까이 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교감을 이루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담긴 시라 할 수 있다.
5. 저녁의 의미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저녁이라는 시간적 경계는 낮의 소란이 어느정도 가라앉고 사물의 형체가 보일락말락하게 어두워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어떤 근원적인 사유나 감정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다른 때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낮과 밤의 경계인 저녁이야말로 사물이 지니고 있는 양성이나 다면성을 포착하기에 적절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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