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석남
아름답고 섬세한 감성으로 마음의 풍경을 묘사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절제된 시어로 내면의 깊은 서정을 보여주는 그의 시는 특히 이미지의 탁월한 구사를 보여 준다.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인하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2003~)로 재직 중이다. 신서정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장석남의 스승인 오규원 시인은 장석남의 시를 “김종삼과 박용래의 중간 어디쯤이다. 귀중한 자리다.”라고 평했다.
2. 배를 매며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출전: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2000
3.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사랑이 시작되는 과정을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매는 일에 빗대어 사랑과 인연의 의미에 대해 노래한다. 표면적으로는 밧줄로 배를 매는 일을 말하지만, 실상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고 있다. 화자는 사랑이란 갑자기 날아든 밧줄을 잡아 배를 매는 것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저항할 수 없이 시작되며, 배를 맬 때 배를 둘러싼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지듯이 사랑 또한 사랑하는 이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배’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공감을 일으킨다.
이 시는 '우연히' 찾아오는,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이별'의 과정도 숨기도 있다. 그러니까 배가 정박할 때보다 항해를 할 때에 더 가치가 있듯이, '만남'이나 '사랑'도 결국 '이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이별에 의해 더 많은 의미 부여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2001)에 이 시와 나란히 실려 있는 작품이 '배를 밀며'이다.
배를 밀며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힘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사랑과 이별'의 의미를 '배를 매고, 배를 미는' 과정을 통해 유추하고 있는 시인의 상상력이 새롭고 돋보인다. 그것은 장석남 시인이 인천의 덕적도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섬에서 자라고 생활하면서 어쩌면 시인에게 '배'는 일상이었고, 삶의 일부였을 것이다.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 시인의 시선. 이 시가 관념의 늪에 빠지거나 허황되지 않은 이유이다. 이렇게 아주 일상적인 체험도 멋진 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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