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스물아홉 번째: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education guide 2024. 9. 19. 13:25

1. 노동을 시로 형상화하다.

정희성 시인은 시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연민이 서정적 언어로 담겨있습니다. 노동과 민중에 대한 시를 많이 쓰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형상화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오늘 볼 그의 작품은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입니다. 시인은 이 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주로 내가 사는 시대의 모순과 그 속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의 슬픔에 관해 써왔지만, 그것이 진정한 신념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데 이르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러한 성과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한 시대의 사회적 모순이야말로 바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며 억압받는 사람들의 슬픔이 어느 땐가는 밝은 웃음으로 꽃필 것임을 나는 믿는다."

 

이러한 시인의 바람이 담긴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만나 보겠습니다.

 

2.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1945- , 향년 80세)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출전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1978)

3. 이숭원, 해설

이 시에 나오는 삽을 씻는다는 말 때문에 흔히 이 시의 화자를 노동자로 보는데, 시인 자신은 하루 일을 끝내고 강변에서 삽을 씻는 농민을 소재로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노동자보다는 농민으로 볼 때 시의 끝에 나오는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 의 의미가 더 실감 있게 다가오며,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저문다는 구절에서도 농민적 삶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농민도 노동자에 속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에서는 공장 노동자가 대부분이고 삽으로 노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농민으로 볼 때 이 시의 전체적 문맥이 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비평가들이 이 시에 대해 노동자 화자에게서 선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는데, 화자를 노동자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비판이 도출된 것이다. 토착 농민의 경우라면 유교적 농본주의 의식이 잠재되어 있어서 선비의 목소리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첫 행에 나오는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라는 말에는 세상 모든 것이 시간에 따라 흐르고 변해 간다는 의식이 담겨 있다. 한때는 농사를 중시해서 거기 모든 것을 집중하기도 했지만 산업의 중심이 중공업으로 이동되자 농민의 삶은 쓸쓸한 소외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루 일을 끝내면 강변에 나가 삽에 묻은 흙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흘러 이렇게 변해 가고 마음에 일어나는 슬픔도 강물에 흘려보내지만 강물의 흐름을 뒤바꿀 수는 없는 것. 언젠가는 강물의 흐름에 의해 희망의 시간이 오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6연에 나오는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이란 구절은 시간의 흐름에 개인의 삶을 맡기는 체념의 지혜를 투사한 말이다. 물이 모든 것을 감싸안고 흘러 스스로 깊어지듯이 우리들도 삶의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가다 보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열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여기 담겨 있다. 겉으로는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나는 돌아갈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라는 구절 때문에 화자가 실의에 잠기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러한 내면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샛강바닥 썩은 물에/달이 뜨는 구나라는 구절이 나올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날이 저물고 자신의 생애도 덧없이 저물어서 어둠 속에 잠기는 것 같지만 샛강 썩은 물 위에도 달이 떠 만물을 골고루 비추는 것이다.  ‘스스로 깊어 가는 강샛강 썩은 물에 뜨는 달이라는 긍정적 심상이 화자의 피곤한 삶과 우울한 심경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는 감상성과 도식성을 극복하고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시로 상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저와 같아서라는 구절은 이 시에 두 번 반복된다. 2행의 그 구절은 물의 흐름을 통해 생의 아픈 경로를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주며 끝 부분에 나오는 그 말은 ‘썩은 물에 뜨는 달’의 이미지를 통해 아픔을 극복하려는 자세를 나타낸다. 비록 상실과 좌절로 이렇게 한 생애가 저문다 하더라도 썩은 물에도 뜨는 달처럼 우리는 다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우리의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달이 뜨고 내일 또 달이 뜨듯이 오늘의 노동 다음에는 내일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샛강바닥 썩은 물처럼 보이는 희망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의 삶은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국면이 실제로 암담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화자의 모습이 밝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는 구절의 다시 어두워라는 말은 현실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인식한 데서 나온 이중적 발언이다. 우리가 돌아가는 모습은 현실의 모습처럼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곳으로 다시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는 의식이 이 짧은 말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농민의 삶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한 데서 나온 시인의 사실적 발언이다. 그래서 이 시에 대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아픔을 차분하고 단아한 어조로 그려 낸 서정시“라는 정당한 평가가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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