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스물여섯 번째: 김종삼, 민간인 民間人

education guide 2024. 9. 12. 14:14

1. 삶의 변방에 서서 그늘을 노래한 시인

천상병은 김종삼에 대해 '말없던 침묵의 사나이'라고 했습니다. 침묵의 사나이가 남긴 시를 읽으면 폐허의 삶을 시와 음악으로 버텨온 한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말이 없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230편이 넘는 시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작품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위안을 주니 그의 침묵은 우리 속에서 여전히 말을 건네옵니다. 그 중 세 편을 만나보려 합니다.

 

2. 김종삼, 민간인

김종삼(1921-1984, 향년 64세)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창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출전 : 《시인학교》 (1977)

 

3. 이숭원, 해설

 

이 시의 첫 두 행은 한 행으로 이어 쓸 수도 있는 것인데 시인은 의도적으로 두 행으로 나누어 적었다. 시간의 분절을 통해 상황의 긴박감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1947년 봄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38선으로 남북이 가로막혀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던 한반도의 역사적 상황을 드러낸다. 몰래 삼팔선을 넘다 들키면 목숨을 잃게 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한밤중에 사람들이 몰래 배를 얻어 타고 남행을 기도한다. “심야“라는 한 단어의 시행은 그 일을 감행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떨림, 그 정적의 긴장감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47년 봄이라는 넓은 시간적 배경과 심야라는 좁은 시간적 배경이 각각 하나의 시행을 이루어 시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 다음에는,  ‘황해도 해주의 바다라는 넓은 공간적 배경과 용당포라는 좁은 공간적 배경이 제시되어 당시의 상황을 더욱 구체적인 장면으로 끌어당긴다. 이 네 행의 전개를 통하여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정황을 긴박감 있게 단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첫 연에서 시간과 공간의 배경을 제시한 시인은 둘째 연에서 당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여 주고 그 사건의 비극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반추한다. 둘째 연은 세 행으로 되어 있는데 각 행의 끝에는 마침표가 굳게 찍혀져 있다. 이 마침표는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던 그 심야의 침묵을 환기하며 살기 위해 우는 아이를 수장시켜야 했던 상황의 비정함을 환기한다. 이것은 긴박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비정함을 드러내면서 그 외의 많은 것들을 함께 연상시킨다. 첫 행과 둘째 행, 둘째 행과 셋째 행 사이에는 사건의 생략이 있는데, 그 생략된 사건 역시 각각의 마침표속에 응축되어 있다. 살기 위해 숨을 죽이고 노를 저어 가던 사람들의 긴장감, 어린애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의 당혹감, 어쩔 수 없이 그 애를 물에 밀어 넣었을 때의 비통함, 그런 일을 겪고 이십여 년을 살아온 사람들 가슴에 새겨진 죄의식 등 복합적 감정이 각각의 행간과 마침표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

 

둘째 연의 첫 행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는 당시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셋째 행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는 현재의 정황을 주관적으로 단정한 것이다. 이 두 행은 주어 서술어를 갖춘 온전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비해 둘째 행은 서술어가 축약된 명사구의 형태로 되어 있다. ‘영아를 삼킨 곳이라는 명사 어구는 첫 연의 끝 부분 용당포와 주술 관계로 이어지는 의미의 연맥이 이루어진다. 영아를 삼킨 곳이 용당포다라는 문장이 성립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회상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움직임은 이 부분을 중심으로 집약된다. 요컨대 둘째 연의 둘째 행에 이 시의 사상과 정서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현재의 반성이 셋째 행에 제시된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가 절제된 시어, 간결한 시행, 문장 부호의 효과적인 사용 등에 의해 매우 시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비극, 더 나아가 민족의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감정을 분방하게 드러내고 긴 사연을 늘어놓는 것이 오히려 감정의 응축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몇 마디 짧은 말과 몇 개의 문장 부호만으로도 절실한 사연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시. 김종삼은 그런 생략과 절제의 미학을 실현한 매우 드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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