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스물일곱 번째: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education guide 2024. 9. 12. 14:29

1. 삶의 변방에 서서 그늘을 노래한 시인

천상병은 김종삼에 대해 '말없던 침묵의 사나이'라고 했습니다. 침묵의 사나이가 남긴 시를 읽으면 폐허의 삶을 시와 음악으로 버텨온 한 인간의 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말이 없었으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230편이 넘는 시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작품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위안을 주니 그의 침묵은 우리 속에서 여전히 말을 건네옵니다. 그 중 세 편을 만나보려 합니다.

 

2.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1921-1984, 향년 64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출전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1982)

 

3. 이숭원, 해설

어려운 시를 많이 대하던 사람은 이 시의 어법에 어리둥절해할지 모른다. 비유적인 표현도 없이 이렇게 소박하게 생각을 진술한 것도 시가 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매끄럽고 정교하게 짜인 수제품만을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즐문토기櫛文土器같은 투박함에 낯설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김종삼의 소박한 어법 때문에 오히려 감동의 격이 높아지는 그런 작품이다.

 

이 시는 1982920일에 간행된 같은 시집 맨 끝에 수록되었으니 그 시기에 쓰여졌을 것이다. 1982년이면 시인의 나이 예순하나, 진갑進甲의 나이다. 1953년에 처음 시를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시를 쓴지는 30년이 되는 해다. 30년 동안 시를 써 온 시인에게 시가 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시인이 아직 되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는 시가 아니라고 늘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세속적인 시단의 분위기에 대한 거부감도 담겨 있는 듯하다.

 

삼십 년 동안 시를 써 온 시인이 스스로 시인이 못된다고 말하는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어진 시>)라는 윤동주의 순정한 고백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시인이 못된다고 고백한 화자는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어 남대문 시장에 이르렀다. 이 경로는 실제로 시인이 늘 걷던 보행 코스 그대로다. 김종삼은 이 지역을 실제로 온종일 천천히 걸어서 해가 저물 무렵에 남대문 시장에 이른 것이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는 많은 노점상들이 있었다. 시장 입구에는 빈대떡, 순대, 돼지머리 등의 먹을거리를 좌판에 올려놓고 팔았다. 좀 더 들어서면 잡화나 의류를 파는 가게가 양쪽으로 있었고 어떤 상인은 리어카 위에 올라서서 골라, 골라 를 연발하며 속옷을 팔았고, 어떤 상인은 무조건 천 원, 무조건 천 원을 외치며 바지를 팔았다. 타이어 튜브 같은 것을 하체에 두르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각종 물품을 파는 불구의 상인도 있었다. 이 사람들을 보며 시인은 바로 이 사람들이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김종삼에게 시인은 언어 세공을 잘한다든가, 이미지 배합을 잘한다든가, 형태를 완벽하게 구성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지녀야 할 덕성을 조화롭게 갖춘 사람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슬기로움이라는 것도 어디서 배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량하고 인정스런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시의 문맥을 통해 말하였다.

 

 

여기에 대해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선량하고 슬기로운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가난이 착하고 인정 많은 것의 선행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순하고 명랑하고 착하고 인정 많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점을 김종삼은 슬기롭다고 본 것이다. 남대문 시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되어도 선량한 모습과 인정 어린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인은 그들이 고귀한 인류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남대문 시장 사람들이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한 약자에 불과하지만 부유하고 힘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내면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속에 담긴 김종삼의 속뜻은 무엇일까? 이 시의 내면에는 시인의 대단한 자존심이 숨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시인이 못된다고 얘기했지만, 남대문 시장 안에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 빈대떡을 사 먹음으로써 어느덧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금박 양장본으로 호화로운 문학 전집을 내는 시인은 못되지만,  ‘세상의 알파이자 고귀한 인류, 영원한 광명, 진정한 시인’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진정한 시인의 자리에 선 것이다. 비록 자신이 지금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 처지지만 어느 이름난 시인보다 더 진정한 시인이라는 자긍심이 이 시의 문맥에 감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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