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서른 번째: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education guide 2024. 9. 19. 13:47

1. 슬픔은 슬픔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절망의 순간은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을 유지시켜주는 가장 강한 희망의 순간이다. 별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이 꼭 필요하듯이 희망을 지니기 위해서는 절망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절망만 보고 희망은 보지 못한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만 보고 정작 그 별을 빛나게 하는 어둠은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정호승 시인의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서 슬픔은 슬픔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시에는 슬픔, 외로움, 쓸쓸함과 같은 여러 감정이 가득차 있지만, 그 감정들은 다시금  희망을 일구어 냅니다. 그의 시어들이 우리를 뒤흔드는 까닭이죠.

 

2. 정호승, 맹인 부부 가수

정호승(1950- , 향년 75세)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출전: 《슬픔이 기쁨에게> (1979)

3. 이숭원, 해설

이 시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동냥을 구하는 맹인 부부 가수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다. 때는 눈 내리는 겨울이고 어둠이 깊은 밤 시간이다. 이러한 시점에 맹인 부부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부터가 매우 극적인 상황 설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시의 문맥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마치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를 듣는 듯이 경어체의 부드러운 어조로 시상이 전개된다.

 

화자는 맹인 부부 가수가 길거리의 사람들에게 동냥을 구한다고 보지 않고 길을 잃고 거리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길을 잃었네라는 말의 반복은 맹인 부부가 길을 잃었다는 의미보다는 우리 모두가 길을 잃고 떠도는 존재라는 의미를 전해 주는 것 같다. 그것은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이라는 구절에서 더 분명한 기색으로 드러난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라는 표현도 꿈과 희망을 잃은 암담한 현실의 정황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이라는 표현 역시 그러한 상황 속에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존재들이고 꿈을 상실한 존재들이며 고통에 시달리는 존재들이다. 요컨대 이 시는 비유적 어법으로 1970년대의 암울한 시대상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배경 속에 맹인 부부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갈 길을 열어 준다고 시인은 보았다. 그러니까 이 부부는 행인들에게 구걸하는 처지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깨우치고 그들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 “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 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그런 높은 정신의 경지를 그들의 노래가 일깨운 다고 본 것이다. 이런 추상적 각성만이 아니라 갈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맹인 부부 가수는 자비의 보살, 사랑의 천사 같은 극화된 허구의 존재로 승격된다. 이러한 생각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낙관적인 이상을 제시한 것 같기도 하다.

 

계속해서 화자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래“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래“라고 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도 자신들의 노래를 계속 부르니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래이고 그 노래를 통해 아름다움이 세상을 건지고 절망이 즐거움으로 바뀐다고 하니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꿈을 불러오는 노래인 것이다. 남들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위안하고 힘을 주는 노래를 부를 뿐이니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눈사람’,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운 꿈의 표상이라고 할 만하다. 그 눈사람은 결국 시간을 초월하여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다.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맹인 부부가 이렇게 특별한 능력을 가질 리가 없다. 이것은 물론 시인의 상상일 따름이다. 시인은 거리에서 본 맹인 부부 가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의 단면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추상적인 관념에 의한 모호한 표현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암울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시인의 낭만적인 소망은 독자들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주었다. 특히 여기 나오는 부드러운 시어와 정돈된 율조, 미세한 감정의 파동은 각박한 시대를 사는 독자들의 마음을 넉넉히 감싸 안고 위무하였다. 서정성과 현실성을 결합한 독특한 어법의 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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