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스물세 번째: 천상병, 귀천歸天

education guide 2024. 9. 2. 14:16

1. 천상병은 천상 시인

 

천상병 시인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시인입니다. 그는 희대의 간첩조작사건으로 밝혀진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6개월 간 고문을 당하며 성기능을 잃었고, 치아도 대부분 빠져버렸습니다.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지만, 그의 시는 항상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귀천'이라는 시는 그의 대표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순수한 마음을 지켜내고 있죠. 그는 1984년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라는 천진난만한 제목의 시집을 내기도 했는데요. 그의 순수한 모습을 떠올려 보면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기도 하지만, 천상의 시인 같기도 합니다.

 

2. 천상변, 귀천

 

천상병(1930-1993, 향년 63세)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출전 : 주막에서(1979). 첫 발표는 창작과 비평(1970. 여름호).

 

3. 이숭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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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의 삶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재를 발휘하여 시인으로 등단하고 평론도 썼지만 어디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천성인지라 직업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던 그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르고 나온 다음부터는 몸과 마음이 망가져 폐인처럼 떠돌며 음주와 기행으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가난과 병고로 얼룩진 생활 속에서도 어린이 같은 천진함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 시에도 시인의 투명하고 순수한 마음과 긍정적인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다. 어떻게 보면 삶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오히려 더 투명하고 순수하게 정화시켰는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 진정으로 순수한 정신이 창조된다는 역설을 그의 삶과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의 시는 장식적 수사나 기교가 없으며 평이하고 담백한 말로 자신의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미련도 없는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돌아간다는 말은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며 때가 되면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억지로 죽음의 세계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늘로 돌아간다는 자발적 선택의 의미도 담겨 있다. 죽음의 순간을 맞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하늘로 돌아가려는 화자에게 길동무가 되어 주는 것은 이슬과 노을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련을 겪은 그이기에 자연을 벗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이슬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존재이며 노을 역시 저녁 하늘을 물들이다 사라지는 일시적 현상이다. 이슬과 노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쉽게 사라져 버리는 가변적 소멸의 대상들이다. 그러기에 지상에서 제한된 시간을 보내다 하늘로 돌아가는 사람의 길동무가 될 수 있다. 생각나는 대로 쓴 것 같지만 천상병은 그 나름의 시적 인식을 가지고 이 시를 구성한 것이다.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라는 구절도 시인의 외로운 삶의 단면을 투사한다. 다른 아무의 개입도 없이 단 둘이서노는 외로움, 가운데가 아니라 기슭에서노는 쓸쓸함 등의 의미가 이 시행에 내포되어 있다.

 

고독한 변방에서 조용하고 쓸쓸하게 일생을 보낸 시인에게 삶은 소풍으로 받아들여졌다. 소풍은 기분 전환을 위해 천천히 걸으며 바람을 쏘이는 일이다. 그것은 업무에서 벗어난 관조와 유희의 시간이다. 사회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에서 벗어난 그의 유랑의 삶을 시인은 소풍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세상을 살지 않고 바라만 보았기에 삶은 이슬이 빛나고 노을이 물드는 아름다운 광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세상을 관망한 그에게 아름다운 이 세상이라는 말은 반어나 역설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그대로를 토로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는 구절도 그의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낸 말일 것이다. “아름다웠더라고라는 과거형 표현 역시 세상을 소풍 삼아 관망한 유랑인의 심리를 솔직하게 투영하는 말이다.

 

이 시가 세상을 살지 않고 구경한 자폐적 몽상가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죽음에 대한 이러한 여유 있는 자세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위안을 준다. 우리 모두 죽음의 공포와 사후의 불안에서 벗어나 초월과 구원을 꿈꾸기 때문이다. 실제로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죽음은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귀환하는 것이라고 인식시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위안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이렇게 인식한다면 모든 사람은 매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천상병의 이 시는 삶을 긍정하고 죽음을 달관하게 하는 위안의 능력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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