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스무 번째: 황동규, 즐거운 편지

education guide 2024. 8. 29. 13:53

1. 편지를 쓴다는 것

1997년 한국 영화 관객 수 1위 영화를 아시나요?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연인을 위해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오는 한 남자와 그의 편지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편지에는 한 편의 시가 등장합니다. 바로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시인은 고3시절에 한 연상의 여인을 엄청 짝사랑했다고 하는데 그 여인에게 보내는 연가가 바로 <즐거운 편지>였습니다. 편지는 마음의 잔물결을 종이 위에 새기는 일이자 종이 속에 멈춰 있는 작은 기억이 조각이라고도 하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는 이를 위해 편지를 쓴다는 것, 사랑하는 이의 편지를 기다린다는 것. 황동규 시인의 시를 통해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2.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1938-, 87세)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출전 : 현대문학(1958. 11)

 

3. 이숭원, 해설

 

1연에서 화자는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대를 생각한다는 말을 선택했다. 그대가 사소하게 여기는 나의 마음이니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화자인 그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내 사랑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고 해서 지던 해가 다시 뜨거나 바람이 거꾸로 부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 사소함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이라는 평범한 자연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자연현상은 늘 대하는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런 자연의 흐름 때문에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표현 속에는 당신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반어적 의미가 이미 담겨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살다 보면 매우 큰 시련에 봉착하여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 가 있다. 그럴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이나 위로가 필요한 법이다. 사랑하는 그대가 바로 그런 시련에 부딪쳐 괴로움을 겪는 상황을 설정해 보았다.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 절망적 상황을 한없이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그대를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오랫동안 전해 오던 사소함이란 말이 중요하다. 아무리 당신이 나를 사소한 존재로 여기고 내 마음을 무시한다 해도 자신의 사랑은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후반부의 다짐은 자신의 사랑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나 화자의 표면적인 어법은 여전히 자신의 사랑을 사소함이라고 반어적으로 말한 데 이 시의 특색이 있다.

 

2연에서는 자신의 사랑을 한없는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내적인 논리를 이해해야 이 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화자는 앞에서 한 말을 부정하듯 말을 바꾸는데 겉으로 드러난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제대로 포착해야 한다. 자신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한 화자는 다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말 바꿈의 의미는 무엇일까? 화자는 골짜기에 퍼붓는 눈을 보면서 아무리 엄청나게 퍼붓는 눈도 아침이면 그치듯 내 사랑도 언젠가는 그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엄격히 따져 보면 모든 인간의 사랑은 언젠가는 끝장나게 되어 있다. 영원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사랑이 끝나겠지만 사랑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진실하게 기다렸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기다림의 자세“란 바로 그런 사랑의 자세를 의미한다.

 

그다음 대목에 시인의 반어적 어법이 다시 빛을 발한다. 후반부에 나오는 그 때’,  ‘그 동안에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 때는 사랑이 그치는 시점을 말하며 그 동안에는 사랑이 그칠 때까지의 과정을 뜻한다. 사랑이 끝나게 될 때까지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랑이 끝날때까지 무수한 시간이 흘러갈 것임을 말한 것이다. 두 개의 믿음이 여기서 충돌한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이라는 믿음과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것이라는 믿음이다. 그 둘의 충돌 속에 반드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역전이 일어난다. 이것은 1연에서 사소함소중함으로 역전된 것과 유사한 것이다. 황동규는 전통적인 연애시의 어법을 깨뜨리고 독특한 아이러니의 어법을 채용함으로써 새로운 사랑 노래를 창조한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사랑의 불변성, 영원성에 대한 호소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영원한 사랑을 호소하는 것은, 설사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그러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니 즐거운 편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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