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⑲: 고은, 눈길

education guide 2024. 8. 29. 12:50

1. 처음 만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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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나오는 말입니다.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이 남긴 명언을 다듬은 표현이죠. 여기서는 사랑이라 표현했으나 마음의 눈이 바뀌는 순간 세상의 모습은 변화한다는 인식론적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늘 마주하던 세상과 경험했던 일들이 이전과 달리 완전하게 새로이 탈바꿈하는 일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고은 시인은 수십 번 보아왔을 눈 내리는 풍경 앞에서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낯익은 마을, 익숙한 풍경 앞에 서서, 낯선 지역,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고은 시인을 찾아왔을까요. 오늘 시는 고은의 눈길입니다.

 

2. 고은, '눈길'

 

고은(고은태, 1933- , 92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1958. 11).출전 : 《피안감성》(1960). 첫 발표는 《현대문학》

 

3. 이숭원, 해설

 

이 시는 1950년대 6·25 전쟁의 폐허 속에 형성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불교적 사유를 기반으로 현상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구도 정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은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제재인데 시인은 일반적인 눈길의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시상을 전개하였다. 눈에 덮인 길의 적막감을 통해 마음의 어둠을 발견하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사유와 삶이 시작된다는 점을 우회적인 어법으로 표현하였다.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이라는 구절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있음’()없음’()이 회통하는 공의 세계를 가리킨다. 지난 것이 눈에 덮여 있으니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눈 속에 덮여 있으니 없는 것도 아니다. 도 아니고 유도 아닌 존재의 실상이 공인데 눈길은 이 공의 상태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눈내리는 풍경을 대했다고 했으며 그 풍경은 온 겨울을 떠돌고 와비로소 발견된 것이다. 방황과 고뇌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각성의 경지는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설레이는 평화를 안겨 준다.

 

눈길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화자는 온갖 것의/보이지 않는 움직임을바라본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본다는 역설의 어법은 불교적인 공의 체득에서 나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대지의 고백까지 들린다고 했다.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둘이 아니듯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이 둘이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라고 말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현상과 본질을 둘로 나누지 않고, 또 있음과 없음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인식하게 된 것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린 눈길의 적막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눈길을 위대한 적막이라고 명명하였다. 눈길을 위대한 적막으로 인식한 시인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안에서는 어둠이 노라라는 명제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지금 화자는 텅 빈 눈길에서 보이지 않는 만상의 움직임을 보고 들리지 않는 대지의 고백을 듣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는다는 감각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보고 들음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 눈 내리는 정경은 설레는 평화와 위대한 적막을 안겨 준다. 그러나 그 평화와 적막을 다시 깨뜨릴 때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고 진정한 공의 체득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화자의 마음은 어둠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차단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서 새로운 각성의 차원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밖에서는 눈길/안에서는 어둠이라는 화자의 고백은 화자의 각성이 아직 진정한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안과 밖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님을 볼 때 진정한 각성에 이르게 된다. 그때까지는 어둠의 마음으로 또 다른 구도의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른다. 시인이 환속하기 전의 작품이기 때문에 온화한 언어로 안정감 있는 구도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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