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소설

분석이 아닌 해설로 만나는 시 스물 두 번째: 김남조, 겨울 바다

education guide 2024. 8. 30. 14:26

1. 겨울 바다에서

 

겨울 바다는 고요하고 조용합니다. 차가운 바람과 파도 소리만이 전해 오는 겨울 바다는 자연의 엄혹함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기 겨울 바다를 찾아간 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깨닫고 왔을까요.

 

2. 김남조, 겨울 바다

 

 

.김남조(1927-2023, 향년 96세)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출전 : 《겨울 바다》(1967)

 

3. 이숭원, 해설

 

이 시의 화자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 바다 앞에 서 있다. 이 시는 겨울 바다의 절대적 고립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자아의 고통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절제된 어조와 선명한 이미지로 절도 있게 표현하였다. 겨울 바다의 차가운 기류를 연상시키는 냉정한 시선이 시상을 이끌어 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고통의 극복은 낭만적인 풍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극한과도 같은 허무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시.

 

1연에서 화자는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이 죽고 없었다고 말한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는 생명과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다.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나 그러기 때문에 더욱 보고 싶던 그 동경의 대상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없는 것이 아니라 죽고 없었네라고 한데서 실망의 강도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죽어서 없어진 것이기에 지금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볼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위무해 주리라 믿었던 동경의 대상이 사라진 데서 오는 상실감은 화자에게 막막한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매운 해풍그대에 대한 생각까지도 얼어 버리고 눈물만이 솟구치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의 심정이 화자의 가슴을 메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바라보는 텅 빈 겨울 바다는 “허무의/불/물이랑 위에 불 붙어 있는“ 상태로 인식된다. 물과 불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마치 휘발유에 타오르는 불처럼 파도 위에 허무의 불이 난무하는 이미지를 시인은 창조하였다. 그의 내면이 이러하기에 그가 바라보는 대상도 온통 허무의 공간으로 보이는 것이다. 출렁이는 물결마다 허무의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이미지로서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위기의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로 생을 이끌어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삶의 지표를 상실하고 위기에 직면한 화자는 4연에서 자신의 내면을 정돈할 매개물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허무의 격랑도 가라앉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 끄덕이며 끄덕이며 “서 있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고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끄덕임’은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앞길을 인도 받으려는 기도의 자세이기도 하다.

  5연과 6연은 삶의 허무와 좌절을 경험한 자아가 기도의 형식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고 구도적 성찰로 나아가는 과정을 표현하였다. “남은 날은/적지만“이란 말에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이 함께 응결되어 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을 살더라도 허무에서 벗어나 열렬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을 화자는 갖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기도의 자세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도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지탱하는 기능적 심상으로 작용하고 있다.마지막 8연은 기도를 끝내고 생의 허무와 고뇌를 극복한 자아의 시선이 나타나 있다. 3연에 나왔던 ‘허무의 불’은 사라지고 고통을 이겨 내게 하는 ‘인고의 물’을 바라보고 있다. 더군다나 그 물은 “수심水深속에 기둥을 이룬“것으로 제시된다. 바다 깊은 곳에 든든히 뿌리내린 인고의 물기둥은 물이랑 위에 타오르던 불을 꺼트리고 자아의 내면을 서늘하게 감싸 안는다. 화자는 이제 뜨겁고 진실한 영혼을 간직하고 생의 현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인고의 물’과 ‘허무의 불’, ‘수심’과 ‘물이랑’은 의미와 표현의 정밀한 대응을 이루면서 이 시를 지탱하는 기능적 심상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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