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농가(憫農歌)>는 농사를 걱정하며, 전가의 농사일에 빗대 나랏일을 비판한 가사 작품이다. 조선 말 호남의 무등산 자락에 살았던 인물 석촌(石村) 정해정(鄭海鼎)이 1884년(고종21)에 지었다. 정해정은 또 <민농가>와 함께 다른 가사 작품 <석촌별곡(石村別曲)>을 지었다. 그래서 <민농가>와 <석촌별곡>을 아울러 보통 ‘석촌가사’라 부른다.
1. 정해정의 생애
정해정은 1850년(철종1)에 태어나 1923년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해정은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송강 정철의 후예다. 그래서 정해정의 석촌가사가 송강가사의 맥을 이었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정해정은 평생 자신의 향촌을 지키며 살았던 평범한 시골 선비였다. 그의 생애에서 향촌을 떠난 출사 이력이나 특별한 활동에 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시종 향리에서 시문을벗 삼아 산수 간을 오가며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담양과 화순과 광주에 걸친 서석산, 즉 무등산 자락 일대가 그가 주로 노닌 곳이었다. 그의 학문과 사승에 대해서도 특별히 밝혀진 바는 없다.
2. <민농가>의 창작 배경
정해정은 그의 나이 35세이던 1884년에 <민농가>와 <석촌별곡>을 지었다. 이때가 그의 인생 중반의 가장 활기찬 시기였다. 반면에 이 시기는 또한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탈로 인해 많은 수난과 변화를 겪던 때이기도 하였다.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에 이어, 1876년에는 일본 침략의 발판이 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또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있었고,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주둔하며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민농가>를 지은 1884년 10월에는 우리 근대사의 큰 사건으로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이 있었고, 그에 앞서 같은 해 6월 에는 복제개혁이 반포되었다. 복제개혁의 요지는 기존 복식을 간소화하여 소매가 넓은 광수의(廣袖衣) 대신 소매가 좁은 착수의(窄袖衣)를 입도록 한 것이었는데, 이 정책은 당시 조야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일어난 것이 정학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과 이단을 물리치자는 위정척사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860년대부터 외세와의 통상 수교 및 개항을 반대하고, 정부의 개화정책을 비판하며 진행되었다. 이항로·기정진·최익현 등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정해정 역시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많은 사건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복제개혁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민농가>는 바로 이런 개항과 개화로 대변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창작되었다. 정해정은 그때 <석촌별곡>과 <민농가>를 짓고, 작품의 창작 동기를 자신이 직접 쓴 발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석촌별곡>은 불우함에서 나왔으며, 또한 나의 뜻을 의탁한 것이다. 가사의 뜻은 지극히 간절하나 조법이 고르지 않아, 필시 고명한 사람의 웃음거리가 됨이 있다. 하지만 어찌 마음을 달래는 바탕이 되지 않겠는가? 무릇 노래라는 것은 본디 불평에서 말미암으니, 이런 끝이 곧 지금 나의 <석촌별곡>이다. 이것을 어찌 우연히 지었겠는가? 결계를 돌아보면, 곧 혜탄의 무리를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감개를 금치 못하는 자가 유독 나뿐이 아닐 따름이라!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훌륭한 옛 제도로 다만 의정이 있는데, 이 갑신년을 다시 당하여 일체를 변혁시키니 이것이 통곡처요, 연재가 이른바 ‘산에 들고 바다를 건너도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함이 어찌 통읍처가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이후로 문을 닫아 자취를 숨기고, 운림에 숨어 인사를 폐하고, 실낱같은 목숨을 스스로 보전할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내가 지나치게 상했다고 이르고, 나를 모르는 사람은 내가 스스로를 버렸다고 비웃을 것이니, 더욱 이것이 걱정이다. 이즈음 간신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소인을 올리고 군자를 물리치며, 하늘의 해를 어둡게 가리고 성스러운 조정을 어지럽히니, 심간이 찢어지려 하고 눈물 콧물이 턱으로 흘러내려, 슬픈 마음이 몹시 심하였다. 지금 세정이 날로 사치함을 일삼고, 재물을 써서 탕진하고, 도적이 더욱 성행하고, 곳집은 비고, 세금에다 세금을 더하여, 생사람의 도탄일 따름이다. 하물며 또한 왜구와 청병이 해마다 늘어나 서울에 두루 머물고, 금년에 이르러서는 곧 지방에도 횡행하니, 이천의 탄식이 이미 목전에 닥쳤다.
<민농가>를 지음에 이르러서도, 역시 시사를 끌어들여 우매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비록 참망한 죄가 혹 있을지라도, 또한 미처 펴지 못한 뜻을 다했으니, 사사로운 것이 어찌 망령되지 않겠는가! 마음속이 끓어올라 도리를 알지 못하겠도다!
갑신년 칠월 이십구일 석촌이 취하여 쓴다.
3. 작품 개요
민농(憫農)’이란 말 그대로 농사를 걱정한다는 뜻이니, <민농가>는 농사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살피는 노래이다. 외형상으로 4음보 1행의 율격이 매우 정연하며, 전체의 길이는 모두 55행이다. 어구에는 한문투가 많이 구사되어 있는데, 특히 시경의 어구가 빈번히 사용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민농가>의 내용 분석을 통해 작품의 성격을 천착해 보기로 한다. <민농가>의 내용은 화자인 작자가 지나가는 ‘노농(老農)’ 또는 ‘농부’를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청유형의 독백조로 시종 기술된다. 전체의 내용은 네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작품의 이해를 위해 먼저 그 요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01행∼04행) : 천하의 대본으로서 농무의 중요성 강조
제2단(05행∼25행) : 전가에서 춘하의 적시에 행할 농사일의 권장
제3단(26행∼50행) : 나라의 문란한 세정과 소인의 발호 비판
제4단(51행∼55행) : 권농의 환기와 왕가의 소인 척결 주장
이 네 단락 중 제1단이 서사라면, 제2단과 제3단이 본사이고, 제4단이 결사이다.
4. 세부 내용, 서사
<서사>
뎌긔가난 뎌老農아 이내農謳 살펴듯쇼
國家의 밋난근본 우리黎民 긔아니며
우리黎民 밋난근본 이내農務 아릴숀야
크거나 뎌큰事業 天下大本 이뿐이라
저기 가는 저 노농아 이내 농가 살펴듣소
나라의 믿는 근본 우리 백성 그 아니며
우리 백성 믿는 근본 이내 농사 아니겠나
크고도 저 큰 사업 천하 대본 이뿐이라
<민농가>의 서두는 지나가는 ‘노농’을 호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고, 백성의 근본은 농무이니, 그것이 곧 유일한 천하의 대본이라고 하였다. 작품을 시작하며 의례적으로 농무의 중요성과 중농사상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민농가>가 보통 농부를 청자로 삼아 농사 일을 말하며 권농하는 기존의 농부가 양식을 표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5. 세부 내용, 본사
稷降播谷 됴흰져씨 徂隰徂畛 地理살펴
破塊燒菑 이暮春의 不違其歲 先務로다
밭이랑에 좋은 씨앗 일궈 묵힐 자리 살펴
농사 준비 이 몬춘에 때 지키기 급선무라
본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먼저 봄을 맞아 때를 놓치지 말고 땅을 일구어 기장의 씨앗을 파종하라고 하였다.
(중략)
묻노라 나라 조세 하은주와 어더한고
공법 조법 조세제는 하은 때에 끼친 법이라
주 나라 철법은 십일지세 그 아닌가
이렇듯 끼치 제도 역대 성조 본을 받아
가볍게 부과함은 이웃까지 좋을시고
어찌하여 권세부려 세금 고하 못 정하니
더할 세금 무슨 일인고 가렴은 어이 할꼬
여러나라 어디인고 길쌈 허탕 오늘이라
봄엔 새 실 먼저 팔고 여름 곡식 다시 내니
중엄하다 저 조세를 어찌 아니 두려울까
아아 농부들아 농사 때를 놓치게 되면
이내 중세 어이 할꼬 번거롭다 사양 마오
이 사이 저 사이에 섞어 핀 저 악초를
어찌하여 용서할까 모든 뿌리 제거하세
제거 못 하면 어이 하리 송인 알묘 이 때문이라
상한 새싹 물론이요 뿌린 씨와 자라는 씨에 가정이라
금년에 못 다하면 명년 제초 누가 할꼬
새싹 나와도 안 여무니 악초의 탓 그 아닌가
묘 논에 있는 가라지 간신과 어떠하며
조 밭에 있는 쭉정이 오랑캐와 어떠한고
풍우 뒤에 저 황충 도적떼처럼 생기는구나
빼어난 저 큰 벼는 군자처럼 곤고하다
이내 농부 아니라면 우리 군자 기를손다
역시 본사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제2단의 안정된 분위기와는 달리 단락을 바꾸면서 전가의 어려움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전가의 어려움을 초래한 주범으로 나라의 어지러운 세정을 지목하였다. 원래 동방의 조세제도는 하·은·주 삼대의 좋은 점을 본받아 가볍게 부과하였는데, 어쩌다 소인들이 득세하여 운용하며 경중을 따지지도 못하고 이중과세에 가렴주구를 일삼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고을 저 고을 할 것 없이 전가의 생활은 어려워지고, 2월에 새로 짠 베와 5월에 수확한 햇곡식을 그대로 내다 팔아야만 하였으니, 중엄한 조세가 두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 무거운 세금을 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농부들에게 작물 사이사이에 섞여있는 ‘악초(惡草)’를 용서치 말고 뿌리째 뽑아내자고 하였으니, 악초를 곧 농사를 망치는 가장 큰 적으로 보고 증오하였다. 그리고는 시야를 나라로 확대하여 새싹 속의 가라지(莨莠)는 간신과 같고, 곡식 속의 쭉정이(糠粃)는 오랑캐와 같고, 풍우 뒤의 누리(蝗虫)는 도적떼와 같고, 외로운 벼(嘉禾)는 군자와 같다고 하였으며, 벼를 가꾸는 농부 즉 야인이 아니면 군자도 길러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소인들에 의해 잘못 운용되고 있는 문란한 세정을 꼬집고, 농사를 정치에 비유하여 악초 같은 소인을 뿌리 뽑고 벼 같은 군자를 기를 것을 소망하였다. 당시의 많은 현실 문제 중에서도 특히 문란한 세정과 소인의 발호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6. 세부 내용, 결사
하자서랴 이내農本 더옥배비 하자서라
輸貢도 하연이와 輔賢인달 아일숀가
黜少人 陟君子른 王家의 大政이요
除惡草 培嘉禾은 田家의 急務로다
어와 뎌農夫아 고처흼써 하자서라
하자꾸나 이내 농사 더욱 바삐 하자꾸나
세금도 내려니와 현인 보필 않을 손가
소인 쫓고 군자 등용 왕실의 큰 정치라
악초 제거 좋은 벼 재배 전가의 급무로다
아아 저 농부야 다시 힘써 하자꾸나
작품을 마무리하며 농본에 충실하자는 권농의식을 다시 환기시켰다. 농사가 곧 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현인을 보좌하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소인을 내치고 군자를 올리는 것이 ‘왕가의 대정’ 즉 국가의 바른 인사이듯, 악초를 제거하고 벼를 잘 기르는 게 ‘전가의 급무’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농부’를 호명하며, 함께 농무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겉으로는 전가에서 서두를 일을 보다 강조한 듯하지만, 기실 나라의 바른 인재 등용을 바라는 마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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