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뇌과학 그리고 공부

조기 영어교육 시키고 싶다고?

education guide 2024. 8. 15. 17:14

중학교 교사인 아내는 첫째가 다섯 살이 됐을 즈음 가정방문 영어교육을 시작했습니다. DVD 기기를 설치하고는 영어 영상 및 노래들도 아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언어만큼은 어릴 때부터 익혀야 실력이 늘 거란 믿음, 대한민국 트렌드가 된 조기 영어교육 상황, 우리 아이만 뒤쳐질지 모르는 불안이 버무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다른 선택을 했고, 아이의 교육을 외부에 맡기는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조기 영어교육에 대한 고민은 영어의 위상과 경험적으로 깨닫는 인간의 언어습득 능력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실제 인간은 어리면 어릴수록 언어를 배우는 능력이 탁월하니까요. 이때 ‘어린'의 의미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가시적으로 말을 시작하는 것은 태어나 1년이 지날 무렵이지만, 인간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음소를 구분할 수 있고, 6개월 무렵이면 상당한 양의 모국어를 내면화한 상태가 됩니다.      

왜 어린 아이들은 성인보다 언어를 더 쉽고 빠르게 배울까요?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언제부터 감소할까요?     

첫 번째 주목할 것은 인간의 어린 시절 음소 습득 능력입니다. /ㅈ/와 /ㅊ/ 차이, [나]와 [너]의 차이처럼 언어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은 이 시기에 아주 탁월합니다. 모음은 약 6개월, 자음은 12개월이면 자연스레 습득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능력은 유통기한이 짧습니다. 최근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생후 1년 즈음해서 빠르게 사라집니다. 저는 아직도 영어의 /r/과 /l/발음, /p/와/f/의 구분이 어려운데, 미국인들도 우리말의 [달]과 [딸]과 [탈]을 구분을 어려워합니다. 어릴 때 익힌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된 후 접하는 외국어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 습득이 가능하며 음소 습득 능력이 사라진 후에 접하는 언어는 모국어처럼 익히는 데는 한계를 가집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문법 학습 능력입니다. 음소 습득 능력과 다르게 이 능력은 어린 시절 유지되었다가 청소년기 후반(17세 무렵)에 급속히 감소합니다. 조기 영어교육의 필요성도 여기서 부각됩니다. 외국어를 배우고자 한다면 이 시기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조기 영어교육은 가치가 있습니다. 언어 학습은 일찍 시작할수록 더 효율적이고, 더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이상적인 조건일 때만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가 두 가지 언어를 동시에 배우는 과정을 떠올려 봅시다. 동일한 대상을 두고 전혀 다른 언어 표현을 접하게 되는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이거 뭐야? 혼란이 느껴지겠죠. 이때 아이의 뇌는 기존 경험, 새로운 경험 속에서 즉각적인 통계 처리를 시작합니다. 이 과정이 순조로우면 새로운 언어를 조금씩 습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통계처리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 인지적 혼란에 빠집니다. 특히 후자를 많이 경험하는 아이의 경우에는 인지발달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는 모국어를 기반으로 여러 능력(논리, 집중, 수리 등)을 확장시켜 가는데, 무리한 외국어 학습이 아이의 사고를 뒤흔드는 거는 것이죠. 심할 경우 학습 능력에, 사회적 관계 형성에도 균열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조기 영어교육을 계획한다면, 아이의 반응, 흥미를 적극적으로 지속적으로 살피면서 진행해야합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고려할 것은 언어를 활용한 상호작용입니다. Patricia Kuhl의 연구를 참고하면, 상호작용 없는 언어학습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그냥 DVD를 틀어주거나 외국어 노래를 틀어주는 것은 실상 학습 효과가 없는 것이죠(그림 가운데).

 

외국어를 배우고자 한다면 수시로 언어에 노출되고, 또 상호작용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영어로 지속적으로 아이와 상호작용해 줄 수 있는 교육 환경일 때 조기 영어교육은 보다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영어로 대화하는데 능숙한 것처럼요.

 

하지만 그런 환경이 아니라면 모국어를 충분히 경험하고 익힌 후에 집중적으로 영어 학습 기회를 갖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물론 이때도 문법학습능력을 고려하여 10세 이전에는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7-8세 무렵이면 모국어의 말과 문자에 충분히 익숙해지므로 외국어 학습을 효과적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1. 인간의 뇌 특성을 고려할 때 언어를 배우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2. 외국어(영어)를 조기학습 시킬 경우 아이의 흥미와 적응 상태를 수시로 살펴야 합니다.

3. 언어학습 과정에서 일방적인 언어 노출이 아닌 수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4. 언어 환경에 따라 먼저 모국어를 습득한 후에 집중적으로 영어 학습 기회를 갖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5. 이때 인간의 문법 학습능력을 고려하여 7-8세 정도에는 영어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외국어를 배운다는 뜻이고, 외국어는 모국어와 달리 일상 속에서 듣고 말하고 읽고 쓸 기회가 상당히 제약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싱가폴이나 말레이시아는 영어가 공용어이기에 수시로 듣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의 환경은 이와 달라서 우리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속 공부해 나가야 하는 환경입니다. 뇌 발달 차원에서 조기 영어공부는 분명 영어를 능숙히 구사하는데 도움이 되는 지점이지만,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배우는 것과 달리 특별히 시간을 투자해서 의도적으로 배워야 하는 우리의 언어적 물리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그 만큼 다른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기회를 놓칠수 있음도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천천히 시작하더라도, 꾸준히 지속가능한 외국어 학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가 보다 중요한 성공 요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교육을 통해 아이가 어떤 배움에 다다를 것인지를 고민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서울대 영어교육과 이병민 교수는 연구들마다 언어학습 '결정적 시기(민감기)'에 대한 견해 차가 있고, 이러한 연구들은 주로 미국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우리 환경에 적용할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뇌의 가소성 측면에서 '결정적 시기(민감기)'는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뇌는 태어난 후 시각피질, 청각피질, 전두엽 피질 등 여러 영역에서 시냅스 생산과 가지치기 과정을 진행해 가는데, 이 과정에서 학습의 결정적시기(민감기)가 좌우되고,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예로 입양아들의 뇌를 스캔한 연구에서, 의식적으로는 기억조차 못하는 생후 1년 시기에 경험한 언어를 뇌는 절로 반응하면서 모국어처럼 처리하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어릴 적 생성된 시냅스가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문헌>

- Johnson, J.S., and Newport, E.L. (1989). Critical period effects in second language learning: the influence of maturational state on the acquisition of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Cognit. Psychol. 21, 60-99.

- Joshua K Hartshorne, Joshua B Tenenbaum, Steven Pinker, A critical period for second language acquisition: Evidence from 2/3 million English speakers, 2018

-  Patricia K. Kuhl, Brain Mechanisms in Early Language Acquisition, 2010

-  Stanislas Dehaene,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 로크미디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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