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사인
1956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1981년 『시와 경제』 동인 결성에 참여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82년 무크 『한국문학의 현단계』를 통해 평론도 쓰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 편저서로 『박상륭 깊이 읽기』, 『시를 어루만지다』 등이 있으며, 팟캐스트 ‘김사인의 시시(詩詩)한 다방’을 진행했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지훈상 등을 수상했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오래 가르쳤다.
1977년 서울대 국문과 학생이었던 김사인은 이른바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걸려 첫 번째 징역을 살았다. 1980년 ‘서울의 봄’에 잠시 해방감을 맛보았으나 광주항쟁이 터졌고, 그는 다시 요주의 인물이 되어 수배령에 밀려다니다 이듬해 다시 잡혀 들어갔다. 1987년 이후로는 노동문학에 관심을 보이며 조정환, 박노해와 더불어 1989년 3월에 <노동해방문학>을 창간해 발행인을 맡았다. 이 때문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장만호 시인은 김사인을 두고 “우리를 어루만지는 뜨거운 손”이라고 했다. 여기서 ‘어루만짐’은 “잘 살펴 만지는 것이고, 두루 만지는 것이며, 때론 깊이 만지는 것”이라 했다. 2006년 김사인 시인은 대산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 시쓰기가, 적으나마 세상의 목숨들을 섬기는 한 노릇에 해당하기를 조심스러이 빌고 있습니다. ‘섬김’의 따뜻하고 순결한 수동성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어떤 간곡함이 제 시쓰기의 내용이자 형식이기를 소망합니다.'
2. 지상의 방 한 칸
세월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 비는 재주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 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 본다
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출전 : 《밤에 쓰는 편지》 (1987)
3. 이숭원, 해설
화자는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족의 걱정을 하고 있다. 며칠 후에는 사는 집을 비워 주어야 하는데 옮겨 갈 거처는 아직 마련하지 못한 처지다. 아이들과 아내가 잠든 곁에서 가장으로서의 자책감에 사로잡힌 화자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 보며 괴로운 마음을 토로한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도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나면 식은땀이 등을 적시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화자의 번민은 가라앉지 않는다. 화자가 겪는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우리에게 온화한 위안의 의미를 전해 준다. 그것은 화자가 가족에게 보내는 따뜻한 애정의 눈길 때문이다.
이 시는 자신의 괴로움을 상당히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혹은 듣는 사람을 생각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듯이 자신이 처한 암담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암담한 상황과 담담한 어조가 대비를 이루면서 오히려 화자가 처한 괴로운 상황이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화자의 따뜻한 애정과 순수한 마음으로 인해 현실의 고통이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을 갖는다. 타인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묘하게 우리가 위안을 받는 그런 체험을 이 시에서 얻게 된다.
이 시는 몸을 기댈 방 한 칸을 얻지 못해 걱정하는 가장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고전적인 정신의 기품 같은 것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한 정신의 품격은 이 시의 바탕에 깔려 있는 혈육 사이의 온정에서 우러난다. 스스로 변변치 못한 아비라고 생각하지만 그 아버지를 믿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어린애, 지아비 곁에 고단한 몸으로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 그들을 지켜보며 괴로워하고 잠 못 이루는 나약한 화자의 모습은 고통을 넘어서는 인정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여기에는 아이의 순결함과 아내의 연약함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 자신을 망망 천지에 초라한 몸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나 순결한 어린 생명과 연약한 한 여인은 그 아버지를 믿고 편안하게 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망망 천지로 생각하는 화자는 자기가 매달리는 원고지를 역시 망막한 운명의 강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탄식했듯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워 밥 비는 재주밖에 없기에 원고지의 글을 통해 망막한 운명의 강을 건널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화자는 창밖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며칠 후면 이 방에 남이 누울 것을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 방에 누운 가난한 사람들의 인정의 흐름이 며칠 후 이 방에 들 사람들과 공동적 연대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또한 순결하고 연약한 존재들의 온정이 확산됨으로써 삶의 괴로움이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은연중 일깨우고 있다. 한밤중 잠 안 자고 일어나 자신의 괴로움을 일방적으로 털어놓은 듯한 이 시가 사실은 공동체적 연대감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4. 문현미, 해설
『행복의 건축』에서 알랭 드 보통은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고 한다 . 그만큼 환경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 새로운 공간에 가면 새로운 생각이 떠 오르기 쉽고 , 좋은 공간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 밝고 넓은 쾌적한 공간에서는 창의력이 신장되고 일의 효율성이 배가된다고 한다 . 그만큼 공간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다 . 그러나 진정한 부와 행복의 열쇠는 광야의 때에 만나를 주신 그분 안에서 누리는 부유함에 있음을 묵상해 본다 .
이 시는 지상의 방 한 칸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시적 화자의 고뇌를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 시의 초반부터 화자는 견디기 힘든 현실 앞에서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고 토로한다 . 이런 좁은 공간에서 여러 식구가 모여서 잠을 자고 있으니 어찌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는가 . 더욱이 가장으로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심정이다. 한 밤중에 홀로 깨어 평화롭게 자고 있는 자식들을 쳐다보는 애비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플’ 만큼 마음이 몹시 무겁다 .
시의 중반부에 이르면 시적 화자인 애비의 직업이 작가임을 알 수 있다 . 작가인 애비는 원고 청탁이 들어오는대로 열심히 원고
지를 메우고 있다 . 하지만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 마침내 못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하니 이 넓디 넓은 지상에서'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 고 울부짓듯 하소연하기에 이른다.
시적 화자가 겪고 있는 지상의 삶이 무척 초라해 보인다 . 늘 전전긍긍하며 한 고비씩 겨우 넘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남의 집 방 한 칸에 세들어 사는 식구들의 모습이 가슴을 누르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 가족의 어려운 살림살이가 눈에 선하게 떠 오르고 어느새 눈물이 핑 돈다 . 시인 자신의 실제 생활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이다. 어떤 미학적 수사 장치가 달리 필요가 없다. 때로는 진정성 있는 컨텐츠로 탁월한 시어의 선택과 행갈이를 통해 아름다운 시의 집을 완성할 수 있다 . 시인 특유의 깊이 있는 시선
으로 그려낸 애틋한 서정의 여운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가을이다.
5. 또 다른 시,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 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게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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