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청준 (李淸俊, 1939~2008)
이청준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1965년《사상계》에 <퇴원>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동인문학상을, 1976년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을, 1990년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이청준 작가는 장인정신과 예술세계에 대한 탐구, 사회적 억압에 억눌린 개인의 심리에 대한 추적,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색 등을 주로 다 룬 작품을 썼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문의 벽》, 《당신들의 천국》, 《이어도》, 《서편제》 《시간의 문》 등이 있습니다.
2. 눈길 속에 감춰진 어머니의 사랑, <눈길>
나는 여름휴가를 얻어 며칠간 머물 계획으로 아내와 함께 고향 어머니 집에 내려오지만, 핑계를 대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겠다고 한
다. 갑자기 계획을 변경한 것은 어젯밤 어머니와 얘기하던 중 어머니가 집을 수리해서 방을 한 칸 더 늘리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서다. 어머니는 현재 단칸방 초가집이 너무 좁아 우리 내외가 내려오면 형수 잠자리도 불편하고, 옷궤도 간수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머니에게 진 빚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형의 주벽으로 집이 파산한 후, 나는 혼자 힘으로 대학까지 마치고 직장을 얻어 현재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우연히 어머니와 아내의 얘기 소리가 들려 마당에서 엿듣게 된다. 집수리를 하고 싶은 것은 당신의 초상을 치를 때 문상객들이 앉아 있을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 두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집에 대한 아내의 물음에 어머니는 17년 전 ‘옷궤’ 이야기를 꺼낸다.
큰 도시로 나가 혼자 공부하고 있던 나에게 집이 팔렸다는 소식이 전해져 나는 집안 사정도 알아볼 겸 고향 집을 찾았다. 소문대로 집은 팔려 텅 비어 있었고 가족들은 소재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찾아와 나를 옛집에서 하룻밤 재우고 새벽에 떠나보냈다. 당시 어머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옛집의 흔적으로 ‘옷궤’ 하나를 그때까지 남겨두었었다. ‘옷궤’ 이야기에 심리적 부담을 느낀 나는 더 이상 엿듣고 있을 수가 없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대화를 중단시킨다.
나는 이제 오늘 밤만 무사히 보내면 서울로 가게 되니 어머니에게 진빚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나는 잠결에 어머니와 아내가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된다. 아내가 끈질기게 물어봐 어머니는 그날 눈이 내린 새벽에 먼 산길을 걸어 버스 타는 곳까지 나를 바래다주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한다. 혼자 되돌아가는 길에 어머니는 내가 밟고 왔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 밟으며 그 발자국 하나하나마다 나를 생각하며 울었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슬픔에 복받친 아내는 급기야 나를 흔들어 깨우면서 무슨 말을 좀 해 보라고 하지만 나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리고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차
오르는 것을 느낀다.
3. 귀향소설
이 작품에서 나는 현재 살고 있는 서울에서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가 휴가를 보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의 소설을 ‘귀향소설’이라고 합니다. 귀향소설이란 주인공이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 사건을 통해 고향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이야기 구조를 가진 소설을 말합니다.
4. 어머니의 감춰진 사랑이 밝혀지다.
<눈길>은 모르고 있던 부모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 작품을 이끌어 가는 중심 구조인 나의 심리적 갈등은
어머니에게 보답할 빚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문제에서 발생합니다. 나는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공부하여 성공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빚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어머니에게 진 빚이 밝혀집니다. 그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 단계는 집수리 이야기 중에 어머니의 마음이 드러난 일입니다. 어머니는 현재 사는 집이 너무 좁아 방을 한 칸 더 들이고 싶어 하나, 나는 이것을어머니가 말년에 호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하고 반대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속마음은 자신이 죽은 뒤 자식과 문상객들이 불편하지 않게장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옷궤’를 통해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드러난 일입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남에게 넘어간 옛집에 옷궤를 그대로 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이 팔리고 살림이 다 없어졌는데도 그 옷궤를 통해서나마 옛집의 흔적을 간직해 내가 찾아왔을 때 슬픔을 덜 느끼게 해 주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나를 바래다주고 혼자 돌아가던 어머니의 심경이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어머니가 정류장까지 나를 배웅하고 혼자 돌아가면서 내 생각에 울었던 절절한 마음을 들은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진 빚을 인정하고 맙니다.
5. 추리 기법과 같은 전개 방식
이 작품의 특징은 독특한 전개 방식을 사용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단서를 단계적으로 조금씩 보여 주면서 독자를 마지막 지점까지 이끌어 가는 ‘추리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감추어진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에게 진 나의 ‘빚’을 효과적으로 밝혀내고 있습니다. 추리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소설이 거의 끝날 무렵까지도 나에게는 ‘빚’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결정적인 단서가 제시되면서 완강히 부인하던 어머니에게 진 나의 ‘빚’이 밝혀지게 됩니다.
6. 배경과 주제
<눈길>은 1970년대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게 된 배경과 현재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산업화는 효율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인간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산업화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가 산업화를 통해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긴 했지만, 산업화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여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이러한 효율성이 적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빚(도움)’을 진 게 없기 때문에 그 빚을 갚을 책임(부모 봉양)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의 결말에서 결국 주인공은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부모의 사랑은 효율성 같은 기준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7. 인물
'나' 는 어린 시절 집안이 파산해 혼자 힘으로 공부하여 현재 서울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좋은 직장을 다니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늘 어머니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있어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아내'는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시어머니가 힘들게 살았던 삶에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서로 직접적인 대화를 피하는 나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머니가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거나 나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어머니'는 형이 노름으로 집안을 파산시킨 후 죽자 홀로 고향에 남아 힘들게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어려운 형편으로 나의 뒷바라지를 해 주지는 못하지만, 평생 나에 대한 미안함과 깊은 사랑을 간직한 인물입니다.
8. 물질적 혜택으로 부모의 사랑을 가늠하는 자식의 모습
이 작품의 주인공은 결국 오랜 세월 외면해 왔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물질적 조건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주인공도 처음 자신은 어머니에게 갚을 ‘빚’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성장하고 성공하는 데 어머니가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자신도 어머니의 노후를 돌볼 이유가 없다는 논리였지요. 이것이 자식과 부모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9. 효율성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
이와 같은 주인공의 사고방식은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인 1970년대 산업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산업화는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능률적이고 효율적으로 물품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산업화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가치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만큼 보답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바로 이 합리주의적 사고의 영향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 도 이러한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어머니의 사랑을 합리주의적 가치로만 판단한다면 어머니의 세세하고도 깊은 사랑은 알아챌 수 없을 것입니다. 합리주의는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발전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건 분명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가치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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