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정희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중학 시절 서울로 상경했다. 1963년 봉은사와의 첫 만남을 통해 죽음에 대해 감지하며 한껏 성장했던 그녀는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여러 상을 수상했고, 2004년 <분수> 라는 시로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 문학 포럼에서 올해의 시인상을 받았다. 2008년엔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부문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정희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등의 십 수권이 넘는 시집을 내었으며 다수의 시가 프랑스어, 히부르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다.
2. 찔레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흰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출전 : 《찔레》(1987)
3. 이숭원, 해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찔레나무와 찔레꽃의 모양을 먼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찔레는 들장미wild rose라고도 하는데 장미처럼 가시가 있지만 가시는 장미보다 작고 꽃 모양도 장미보다 작다. 5월부터 흰색이나 연분홍색 꽃이 원형으로 모여서 핀다. 이 시는 작은 가시와 작은 꽃 모양을 지닌 찔레를 아픔을 간직한 사랑의 상징으로 설정하여 표현하였다.
1연은 찔레가 피는 신록의 계절감을 배경으로 초록빛 그리움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다. 때가 되면 초록빛 잎이 만발하고 흰 꽃을 피우는 찔레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풍요를 이루고 저절로 꽃을 피운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뜻대로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기쁨보다는 슬픔을 남기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더 다가서면/서로 꽃이 되었을“ 사이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하여 헤어지게 되고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아픔과 슬픔을 체험하면서도 “꿈결처럼/초록이 흐르는“ 계절을 맞이하면 이유 없이 가슴이 설레며 다시 초록의 잎을 달고 새로운 사랑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먼 여행에서 돌아와/이슬을 털 듯 추억을 털며“라는 구절은 바로 그렇게 과거의 추억을 털어 버리고 찔레의 초록 잎과 흰색 꽃처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사랑의 지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법이다. 나의 진심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서 슬픈 경우도 있지만 상대방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슬픈 경우가 더 많다. 이기적이고 혼탁한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이 설 자리는 정말 좁은 것이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라는 시행은 바로 그런 진정한 사랑이 주는 아픔을 고백한 것이다. “ 아픔이 출렁거려/늘 말을 잃어 갔다“라는 고백 역시 사랑의 진정성을 드러낸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부터가 아픈 일이고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으니 말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진실한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과 시련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 아픔까지 함께 간직한 사랑을 사람들은 꿈꾼다. 만물이 초록으로 물들고 하얀 찔레꽃이 송이송이 피어나는 계절에는 어떠한 아픔이 오더라도 사랑에 자신을 투신할 그런 충동이 생기는 것이다. 어떠한 아픔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가면 그 아픔도 가라앉아 “예쁘고 뾰족한 가시“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찔레꽃은 그런 아픔을 간직한 사랑의 형상으로 아주 어울리는 꽃이다. 이렇게 아픔까지 자연스럽게 수용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사랑의 감정은 더욱 성숙된다.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는 말은 아픔과 슬픔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의 자세를 암시한다.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한 그루/찔레로 서 있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슬픔과 아픔의 궤적을 거쳐 “아픔조차/예쁘고 뾰족한 가시로/꽃 속에 매달고“ 극복의 단계에 이르러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는 대승적 발원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소박한 사랑의 감정이 깊은 사랑의 정신으로 승화되는 내면의 변화 양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억센 가시와 화려한 꽃을 지닌 장미가 아니라 예쁜 가시와 작은 꽃을 지닌 찔레가 승화된 사랑의 표상으로 잘 어울린다는 점을 이 시에서 새삼 깨닫게 된다.
4. 또 다른 시
<부부>
부부란 무더운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어디다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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